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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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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나서서 그의 마지막 말이라도 들어보자고 하지 않았다. 모두 한통속인 것이었다. 허균은 금부에 붙잡히기 전날 자기의 문집 『성소부부고』 초고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원고를 딸네 집으로 보냈다. 아마 이때 『홍길동전』도 함께 보냈을 것이다.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주요한 원고를 빼돌린 것이다. 그때 만약 『성소부부고』와 『홍길동전』이 금부 나졸들에게 압수되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이마에 소름이 돋는다.

일찍이 이탁오가 자기의 책이 세상에 나오면 불태워질 것이라 하여 『분서』라 짓고, 깊이 감춰야 한다는 뜻에서 『장서』라 지었지만, 그의 사후 『분서』와 『장서』는 햇볕을 보게 되었듯이 허균의 원고도 용케 감추어져 먼 뒷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지만 허균은 「이탁오의 '분서'를 읽고」란 시를 지을 때만 해도 나중에 자기 책이 분서나 장서의 운명에 놓일 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시의 첫 연이다.

"맑은 조정에서 독옹(이탁오)의 책 불살랐지만 / 그 도는 불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네 / 불교든 유교든 깨달음은 한 가지거든 / 세상에선 이 말 저 말 분분키도 하군."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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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저술은 후손들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분서의 운명을 보면했으나 그의 호민사상과 이상주의 철학은 철저히 불태워졌다. 동시대는 물론이고 당대의 문사ㆍ사관들은 그를 모질게 배척하고 매장시켰다. 인조반정 뒤에도 다르지 않았다. 체질화된 주자학적 의식과 이미 편입된 기득권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해서 였을 것이다. 

그를 비판ㆍ비방하는 경우는, 본인도 인정하는 경박하고 무례하다는 표현은 상급이고 "여우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라는 악평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반역죄로 처형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료나 실록에서 호평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살았을 때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악담과 이것이 전파되는 과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저는 불행히도 엄청난 훼방에 걸렸습니다. 그리하여 훼방하는 자 한 사람이 족히 나를 기리는 사람 백 명의 입을 깨뜨릴 수 있는데, 하물며 훼방하는 자들은 온 나라에 가득하고 기리는 사람은 겨우 형들 몇 사람뿐이니, 비록 내 이름을 추천서에 넣어 몸이 가까운 반열에 오른다 하더라도 조낭(早囊)의 봉사(封事)가 뒤미쳐 이르지 않으리라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주석 6)

허균은 자신의 울혈한 성깔과 분방한 행동,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 등, 체제에 순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사의 비위나 맞추고 아부하면서 비루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상력이 키워지고 비상의 날개가 돋고 승천하고자 하였다.

나의 평생을 익숙히 헤아린 바, 비유하건대, 강물고기나 들새와 같아서 연못에서 살리고 조롱(鳥籠) 속에 길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소원한 자취로 시종(侍從)ㆍ귀연(歸燕)의 말석에 기웃거리게 된다면 편협한 마음과 모난 행동이, 남의 비위나 맞추고 아부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여 한 마디로 비위를 거스를 경우, 문득 천 길 낭떠러지로 밀어뜨리고 불난 데 기름을 더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주석 7)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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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좌절과 패배는 어찌보면 역사에서 가끔 보는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이 겪은 패배와 동류항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쉽고 통절한 것은 그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렇다 할 혁명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이다.

고려 때만 해도 1198년(신종 원년)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이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種)가 따로 있느냐"며 만인평등사상을 제시하며 들고 일어나고, 묘청ㆍ정지상 등이 1135년(인종 13년)에 사대세력에 맞서 자주를 내세우며 봉기했다가 김부식이 이끈 보수세력에 참살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줄기찬 개혁의지가 꿈틀거렸다.

조선조에서는 초기 개혁정치를 주도한 조광조의 비통한 죽임에 이어 1589년(선조 21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참혹하게 진압된 이후 혁명적인 개혁 마그마의 씨가 밀리고 말았다. 허균이 처형된 후 1894년 전봉준ㆍ김개남 등이 폐정개혁을 들고 봉기할 때까지 276년 동안 조선에서 홍경래 난을 비롯 민란은 더러 있었으나 혁명적인 거사는 한 번도 없었다.

거대한 바닷물이 0.3% 정도의 염분에 의해 정화되듯이, 역사는 혁명ㆍ의거ㆍ개혁을 통해 진보과정을 겪는다. 조선왕조로서는 마지막 기회이던 동학혁명마져 외세를 불러들여 진압시키고 종국에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허균의 꿈이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


주석
6> 「이대중에게 보낸 두 번째의 글」, 이문교, 앞의 책, 370쪽.
7> 앞의 책, 37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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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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