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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하성환 시민기자는 논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신화, 그 왜곡된 집단기억'(밀양문학 제33집)을 썼습니다. 이 글은 해당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편집자말]
고등학교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286쪽에 독립전쟁의 두 영웅이라는 해설과 함께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을 연상시키는 개인영웅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눈에 띈다
▲ 독립전쟁의 두 영웅 홍범도(왼쪽)와 김좌진(오른쪽) 고등학교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286쪽에 독립전쟁의 두 영웅이라는 해설과 함께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을 연상시키는 개인영웅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눈에 띈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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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머릿속엔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한국사> 교과서(미래앤)에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서술하면서 홍범도와 김좌진 사진을 게재해 놓고 있다. 개인 영웅사관에 기초한 편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 사실과 거리가 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대한북로독군부이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형제가 이끈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한경세의 신민단 등 6개 연합부대로 결성됐다. 봉오동전투를 앞둔 1920년 5월 19일 결성됐다. 홍범도 부대는 5월 중순에 합류했을 뿐이다.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끈 실질적 지도자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최씨 형제들이 중심이 돼 훈련시킨 군무도독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즉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고 김좌진(제1연대장), 홍범도(제2연대장), 오하묵(제3연대장)은 최진동의 지휘를 받는 연대장의 위치였다. 그러면 왜 교과서에 서술되지도 않은 군무도독부가 봉오동전투에서 중심이 되었는가? 그것은 최진동 장군이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이 된 것과 관련이 깊다.

봉오동 전투의 역사 다시 쓰여야 

최씨 3형제는 일찌감치 1912년에 봉오동 황무지를 일궈낸 신한촌 선각자들이었다. 특히 최운산 장군은 북간도 일대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신한촌 조선인들과 옥토로 개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최운산 장군은 북간도 제1의 갑부로 3일 밤낮을 걸어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토지소유자였다. 북간도에 소유한 토지 규모가 1960년대 당시 부산시 넓이의 6배에 달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비누공장, 국수공장, 주류공장, 성냥공장, 과자공장, 콩기름공장 등 여러 생필품 공장을 경영해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또한 축산업을 통해 소 수백 마리를 훈춘, 러시아 지역에 판매했던 무역업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축적한 토지와 재산을 전부 독립운동자금으로 쏟아부었다.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소유한 총기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사용한 무기와 병참, 보급 일체는 최운산 장군의 사재를 털어서 이뤄진 것이다. 이는 봉오동전투 당시 여성독립군 김성녀 여사 진정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입었던 군복 또한 봉오동 요새에 마련된 재봉틀 8대를 독립군 여성들이 밤낮으로 돌려 제작한 정규군 복장이었다. 견장을 달고 장교들은 금줄을 둘렀다고 했다.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동북 군벌 장작림 군대에 복무한 경험이 있었기에 독립군 군복 색깔은 중국군과 비슷했다. 최운산 장군 부인이자 여성독립군 김성녀 여사는 하루 한 끼에 3000명분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최근 KBS에서 기획한 '파르티잔, 늑대의 시대 1, 2부'에서도 러시아 연해주 최재형과 함께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체코병단으로부터 구매한 총기는 당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으로 일제 아리사카 소총보다 화력이 월등했다. 총신 및 탄알 구경, 탄알의 유선형 형태, 그리고 유효사거리에서 훨씬 우수했다. 

일본군이 사용한 아리사카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550m였던 것에 비해 모신나강 소총은 750m로 더 뛰어났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는 모신나강 소총뿐만 아니라 맥심기관총을 보유하였다. 독립군 부대는 장총, 권총, 기관총뿐만 아니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독립군 병사들마다 수류탄도 1개씩 지급되었다. 최운산 장군을 비롯해 최씨 형제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오늘날 화폐가치로 수백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공동체에 아낌없이 기부한 것이다.

봉오동 사령부에서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갈 때마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식량 등 군수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출발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을 이루었다고 했다. 모두 최운산 장군의 사재에서 출연한 군자금 덕분이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병력이 숙영한 공간인 왕청현 서대파와 6개월 단기 사관양성소인 십리평도 모두 최운산 장군이 제공한 토지였다. 

실제로 동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이상설, 안중근, 김좌진, 이준 열사 등 항일독립지사치고 최운산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최운산 장군은 그들 항일독립지사들을 극진히 환대했고 서전서숙을 비롯해 동북만주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2년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한 최씨 형제들은 마적들로부터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 자위대 병력 100명을 두었다. 1915년엔 500명으로 늘어나 도독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봉오동 산 중턱을 깎아 3000평 규모의 연병장을 조성했다.

700명이 머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병영 막사 3개동도 지었다. 그리고 일제 밀정이 정탐하지 못하도록 연병장 둘레에 거대한 토성을 쌓았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 발행한 통행증과 비표가 없으면 즉결처분할 정도로 삼엄했다. 

당대 최정예 일본군을 상대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독립군 정예부대를 보유한 것과 함께 러시아 교관을 초빙해 8년에 걸쳐 매일같이 실전처럼 꾸준히 군사훈련을 수행한 덕분이다. 결코 우연히 일본군 19사단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한 전투가 아니었다. 당대 가장 첨단을 달린 무기로 무장했고 중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최진동과 최운산, 최치흥 3형제가 러시아 교관을 초빙해 실전처럼 군사훈련을 주도한 결과였다. 실제로 봉오동 군관학교를 운영한 셈이었다.

이제 봉오동전투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아니라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훈련시킨 최정예부대 군무도독부 중심으로 기술해야 한다. 나아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교과서에 당당히 기술해서 다음 세대가 제대로 알게 해야 한다.

태그:#봉오동전투, #최진동, #홍범도, #군무도독부, #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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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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