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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하성환 시민기자는 논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신화, 그 왜곡된 집단기억'(밀양문학 제33집)을 썼습니다. 이 글은 해당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편집자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집단 망명을 주도하고 600억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3500명 독립군을 길러낸 아나키스트 항일혁명가 이회영! 우당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기 위해 1990년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1년 서울농학교 앞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 우당기념관(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소재)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집단 망명을 주도하고 600억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3500명 독립군을 길러낸 아나키스트 항일혁명가 이회영! 우당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기 위해 1990년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1년 서울농학교 앞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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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로 우당 이회영 형제를 기억한다. 6형제에 5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집단 망명한 이회영 형제 일가는 전 재산 600억 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쏟아부었다. 서간도 류하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독립군 3500명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이 의열단이 되고 봉오동전투의 구대장과 중대장이 되어 승리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마찬가지로 북간도에선 최운산 형제들이 오늘날 화폐가치로 수백억에 달하는 전 재산을 쏟아부어 670명 정예군대 군무도독부를 양성했다. 봉오동전투 당시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연합부대를 주도한 인물들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들이었고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6개 부대를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수천 명에 이르는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을 먹이고 입혔으며 무장시켰다. 봉오동전투의 승리 요인으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북간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진동 장군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촬영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오른쪽), 홍범도(왼쪽)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진동 장군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촬영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 반병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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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100주년을 앞두고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화 자체가 허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중에게 미치는 역사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영화 <봉오동전투>는 아쉬운 장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 감자 한 알을 두고 여러 독립군이 나눠 먹는 장면이나 누더기 군복 복장으로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봉오동전투가 기본적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전이었음에도 전신을 노출한 상태에서 총격을 가하는 장면 등에서 좀 더 고증을 거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 제1회전>이었다. 당시 안무의 국민회군을 비롯해 독립군들도 그렇게 불렀다. 봉오동전투 이후 4개월 뒤에 치른 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인 셈이었다. 

그런데 영화 <봉오동전투>에선 봉오동전투를 '조선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황당한 대사가 나온다. 명백히 고증을 거치지 않은 잘못이다.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봉오동전투 영웅으로 등장하는 홍범도 장군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봉오동전투=홍범도'라는 기존 인식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못내 아쉬웠다.

봉오동전투의 영웅은 8년에 걸쳐 봉오동 골짜기에 터를 잡고 신한촌을 일구며 독립군을 실전처럼 양성해온 최씨 형제들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항일독립투쟁에 쏟아부어 조선인 청년들을 독립군관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다. 명실공히 최진동-최운산-최치흥 최씨 형제들은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진정한 민족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연합부대가 거둔 승리인 것처럼 기술돼 있다. 2021년 발간된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보자.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을 위해 만주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대한 독립군과 북로군정서가 대표적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진입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해 왔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 고등학교 <한국사>(금성출판사) 184쪽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일궈낸 '도독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에 대한 언급 또한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 내에서 핵심주력부대인 군무도독부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아니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라고 기술했어야 정직한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온라인상에 등장하는 백과사전이나 청소년용, 어린이용 사전, 그리고 설민석의 봉오동 역사강의 동영상에서도 홍범도를 봉오동전투의 영웅처럼 기술하거나 강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일부 교과서엔 아예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인 최진동에 대한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체이자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를 교과서에 기술해야 할 것이다. 하루빨리 봉오동전투의 영웅이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주도한 최씨 형제들이었음을 인식하고 수정되길 기대한다. 더구나 서간도에 이회영 형제들이 있었다면 북간도엔 최운산 형제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음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균형 있게 기술해야 할 것이다. 

태그:#봉오동전투, #최운산, #최진동, #군무도독부, #대한북로독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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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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