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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정기구독지가 반갑다. 하나는 <좋은 생각>이고 또 하나는 <샘터>다. 둘 다 젊은 시절에 종종 즐겨보다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재작년 에세이를 함께 하는 문우들과 글쓰기를 동행하면서 소시민의 삶을 전해주는 이 잡지들이 생각나 다시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우연히도 엄마 얘기를 쓴 내 글이 두 잡지에 실리는 행운이 있었다. 두려운 나의 글쓰기 심정을 알았는지 글 채택은 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좋은생각'과 '샘터' 7월호에 내 글이 실렸다. 간이정거장 에서 잠시 쉬어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내 두려운 글쓰기를 격려해준다.
▲ 정기간행물 "좋은생각과 "샘터" "좋은생각"과 "샘터" 7월호에 내 글이 실렸다. 간이정거장 에서 잠시 쉬어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내 두려운 글쓰기를 격려해준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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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을 공개적으로 쓴 지 3년 째다. 작년에 난생 처음으로 에세이 영역에서 책 출간을 했다. 올해도 두 번째 출간을 위해 시시때때로 글을 쓴다. 첫 번째 책 출간이 있기까지, 글쓰기의 비법을 찾아서 이리저리 글쓰기 독서책 탐구의 시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강원국의 글쓰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등의 책을 포함하여 20여 권의 글쓰기 관련 책을 읽었다. 글쓰기 관련 동영상을 볼 때는 초보 글쟁이인 내 맘을 읽어주는 듯해서 '아하, 그렇지, 그래그래, 맞아'라고 감탄했다.

책꽂이에 놓인 책들, 그 중 포스트 잇이 현란하게 붙어있는 책들을 다시 보며 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지금 당신의 글쓰기에 얼마나 발전이 있나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말할까요?'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다.

첫째, 한여름 더위에 시원한 물이 내장을 관통하듯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게 쓴 글
둘째, 문장의 처음과 끝이 꼭 맞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지퍼 옷자락 같은 글
셋째, 사자성어 모른다고 무시당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지닌 우리말의 글
넷째, 1인칭 화자인 내 글 속에 다른 이가 들어와도 '그렇군' 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글
다섯째, 머리로 생각한 글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부대낀 흔적에 눈물겨운 글
여섯째, 글을 보면 저절로 글쓴이의 말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느끼게 하는 글
일곱째, 감동의 메아리를 꼭 전해줘야지 하며 작가의 이메일을 찾아보게 하는 글
여덟째, 작가의 다음 글 소재로 내 얘기는 '어떻소'라고 오지랖을 펼치게 하는 글
아홉째, 글을 읽다가 오탈자가 있어도 '으음 누구나 실수는 있지'라고 웃어주는 글
열번째, 다른 사람 안 사도 나는 꼭 사서 책장 위에 명작처럼 올려놓고 싶은 글

에세이반 모범생이 되고 싶어서 지난 3년 동안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일단 사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산 책도 많아서 읽어야 할 책은 내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놓고 눈길 갈 때마다 읽는다.

특히 올해는 박완서 작가의 책 10여 권을 다시 읽으면서 젊은 시절 읽었던 책인데도 느낌이 낯설고 다르다. 그동안 살아온 내 세월이 덧대어져서 그런지 다시 보는 글이 새롭고 귀하다. 마치 새 작가의 새 글을 만나는 기쁨이다.

내가 쓰고 있는 에세이 영역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은 건지. 어디 숨어 있다가 망망한 작가의 대양 위에서 도도하게 글 춤을 추는지. 전문가가 따로 없는 세상을 언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다른 생물체들의 언어는 언제 다 배우고 익혀서 '글쓰는 사람'이라는 고유영역을 탄생시켰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도 이 물결의 한 자락이라도 움켜잡고 따라가고 싶은데 잡으려 하면 어느새 허공으로 사라지는 힘겨움이 앞선다.

그러나 사소하고 미진한 글일지라도 잡지에 투고하는 즐거움이 글쓰는 힘겨움을 대신할 때가 있다. 두어 달 전에도 이 잡지들을 읽다가 또 한번 내볼까 하는 맘이 들었다. 나에게 이 잡지들의 응모공간은 간이정거장 같다. '좋은 생각'에는 남편과 함께하는 봉사활동 얘기 <꽃심 세우는 밥심>, '샘터'에는 낡아버린 운동화를 그린 <그리움1호, 구멍난 운동화>를 응모했다.

또 한번 운 좋게도 두 잡지의 7월호에 글이 채택되어 실린다고 편집자의 전화를 받으니 선물과 응모료도 준다고 했다. 사실 글로써 자신의 존재를 보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질적 응대보다 더 귀한 것은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눈길과 마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얻기가 하늘의 비밀을 캐내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늘 높이 치솟는 교회의 첨탑 속에 간절한 사람의 소망을 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글 쓰는 이의 마음을 이에 비교하면 무리일까. 고미숙 작가의 말처럼, 읽고 쓰는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거룩하고 고결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글쓰는 이는 분명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쓰고 그리도록 허락받은 통쾌한 무기의 소유자다. 단지 글 쓰는 자는 하늘의 마음을 핑계 삼아 자신의 재능이 넘치는 그릇은 갖지 않는 절제도 필요하겠다.

오늘도 나는 글쓰기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는 작가들의 한 줄을 읽어본다. 글쓰기에 희망이 있고 글쓰기에 기적이 있고, 글쓰기에 운명이 결정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 와 닿은 가장 좋은 한 줄은 '글쓰기에는 내가 살아 있다'는 말이다. 몸 뿐만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로지 글쓰기인 것 같다.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에서 작가는 쓰기 도구인 연필을 밥벌이의 도구라고 했다. 글자를 작가의 실핏줄이라고 했다. 책상 위에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쌓이면 작가의 하루가 다 지나간다고 했다. 나는 비록 내 글쓰기가 밥벌이의 도구도 아니요, 글자 한 자가 내 몸을 지탱하는 실핏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한다.

연필을 대신해서 타이핑을 치는 나의 손가락 지문이 노트북의 자판 기호들을 흐릿하게 만들어주길 원한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이왕이면 동사들이 튕겨 나와 내 삶을 생생하게 노래하길 원한다. 나만 바라보지 말고 나 밖의 사람들의 삶도 더불어 생각하며 써주길 원한다.

하루라는 시간에 맞추지 말고 나도 모를 순간에 훅하고 떠오른 생각을 바로 써주길 원한다. 그렇게 써진 글이라야 글 속에 내가 있을 것이고 내 존재의 기쁨이 될 것이다.

태그:#정기간행물좋은생각, #샘터, #글쓰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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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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