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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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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와이에 이주하여 목회와 한글교육을 시작할 즈음의 미주 특히 하와이의 교포사회는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하와이 8개의 유인섬에는 한인교포 6,5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이 백인소유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일하고, 자작농으로 성장하거나 도시로 진출하여 채소상, 재봉소, 이발관 등을 운영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교민도 더러 있었다.

이승만이 1925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되어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의 무장투쟁론과 이승만의 외교활동론이 부딪히고, 교포조직인 대한인국민회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들어왔던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를 발행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으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임시정부 대통령(초기에는 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으나 결국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탄핵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으로 하와이 교민사회는 분열상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박동완은 이승만이 배재학당의 선배인데다 국내에서 흥업구락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이승만과는(비록 상면하지는 않았지만) 각별한 연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재학당 시절에 두 사람의 관계는 알려진 기록이 없다.

이승만은 1930년 말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꿔 속간하는 한편 대한인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이 종신총재로 추대받았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이승만이 미주에서 주도하고 있던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하자 그는 이에 맞서 한때 임시정부를 상하이에서 하와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럴 역량이 없었다. (주석 10)

이승만은 여전히 하와이에서 막강한 위상을 보이며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동완은 이승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목회일과 한글학교 운영에만 열중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크게 성장하고 국내에 지원하는 일도 하기에 이르렀다.

박동완이 담임하고 있던 와히아와 교회의 교세를 1938년도 한인기독교회(K.C.C.)연회에 보고된 상황을 기준으로 본다면, 장정교인 47명을 포함해서 교인이 200명이었으며, 주일학교 생도가 120명, 세례 아동이 121명, 국어학교 학생이 50명으로 교회 기지 가격은 4,500달러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최창덕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와히아와 교회는 성도들이 어렵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중 일부를 한인 선교회에 보냈다. 그 돈은 선교회의 운영과 한국의 미자립 교회를 위한 기금으로 쓰여졌다. 박동완은 부인구호회를 활성화시켜 음식판매 등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도 조달하였다. 제한된 수입과 지출로 인해 목사 월급이 미지급 될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어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주석 11) 


주석
10> 김삼웅, <이승만평전>, 136쪽, 두레, 2020. 
11> 이덕희, <한인기독교회ㆍ한인기독학원ㆍ대한인동지회>,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195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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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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