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깊어가는 가을, 을지로 대림상가 보행로의 철학서점 '소요서가'에서 칸트철학 강의를 듣는다. 도심 한복판 이른바 힙지로(힙한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청춘들이 모여 자신들의 인스타 목록을 채워가는 이곳에서 철학 강연이라니. 

소요(騷擾)는 여럿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노는 행위,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라는 뜻과 함께,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위 같은 소요(逍遙)의 뜻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산책길(페리파토스)에서 학도들과 산책하며 강의했던 소요학파(페리파토스 학파, Peripatetic school)에서 착안한 서점의 이름은 세운상가에서 대림상가에 이르는 보행로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대림상가 보행로에 생긴 철학서점 '소요서가' 간판에 여러나라 언어로 같은 질문을 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서점 "소요서가".  대림상가 보행로에 생긴 철학서점 "소요서가" 간판에 여러나라 언어로 같은 질문을 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 한준명

관련사진보기

 
철학적 사유와 담론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자 하는 기막힌 중의성의 자리에 철학서점 '소요서가'가 있다. 유심히 들어다 보아야 보이는 간판의 글씨들은 여러나라의 언어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196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단지로 지어진 세운상가는 1970~1980년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기운(世運)이 모두 모여 흐르는 것처럼 사람들로 넘쳤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전자제품의 성지였고, 온갖 생활용품과 신제품, 약장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물건들을 선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의 기술자들이 모이면 항공모함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허풍만은 아니라는 듯 그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인 유하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이곳에서 경험한 것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내 유년의 뒷골목 상상력 또한 이곳에서 나왔다.

1980년대 후반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세운은 쇠락하기 시작한다. 오락기기나 노래방기기, 음향기기 부품업체들이 남아 근근히 유지되다가 각종 불법복제 음반이나 불법도서의 판매처가 함께 자리하면서 낮에도 선뜻 올라가기 꺼려지는 곳으로 슬럼화된다. 
 
5,6년 전부터 보행로에 다양한 상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힙지로로 탈바꿈 중이다.
▲ 대림상가 보행로 5,6년 전부터 보행로에 다양한 상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힙지로로 탈바꿈 중이다.
ⓒ 한준명

관련사진보기

 
2014년 서울시에서 이곳의 보행데크를 재정비하고, 세운상가와 대림상가와 삼풍상가의 보행교를 재건하여 전자상가의 메카를 복원하겠다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야심차게 진행되었지만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5, 6년 전부터 대림상가 보행로에 '호랑이 카페'와 '이멜다분식' 같은 당시로도 특이한 상점이 들어서면서 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익선동, 성수동, 문래동, 을지로와 같은 이른바 힙지 목록은 이미 이런 움직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는 특색 있는 공간을 찾는 사람들로 대림상가 보행로는 늘 북적인다. 이른바 힙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힙한 공간에 철학서점이라니! '소요서가'의 존재감은 이 묘한 이물감에서 출발한다.
​ 
좋은 철학책, 꼭 읽어보면 좋을 만한 철학책이라면 대형서점 이상으로 많다. 좋은 철학책도 추천해 준다.
▲ 철학서점 "소요서가"의 서가 좋은 철학책, 꼭 읽어보면 좋을 만한 철학책이라면 대형서점 이상으로 많다. 좋은 철학책도 추천해 준다.
ⓒ 한준명

관련사진보기

 
칸트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사유를 완전한 주체의 영역으로 독립시켰다. 그리고 근대윤리과 근대예술철학을 완성한 위대한 독일의 철학자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헤겔과 더불어 철학의 5대 천왕으로 칸트를 거론하지만, 가장 위대한 서양철학자를 한 명만 꼽으라면 칸트를 꼽는 데 많은 철학자들이 주저하지 않는다.

"경험에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 작동하며 정당성의 권리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이성의 힘입니다. 문제는 그 권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입니다. 자신의 지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칸트는 말합니다."  - 윤상원 '소요서가' 대표의 강연 중

언뜻 생각하면 참 지당한 이 말을 하기 위해 근대철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중세의 논리에 위협당하며 싸워왔던가. 지금 여기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지당한 이 논리를 얼마나 실천하며 살아가는가. 이상과 현실의 경계, 당위성과 공포의 경계를 사는 나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머리가 조금 더 복잡해진다.

그런데 서울 도심이 흥청거리는 주말 오후와 밤을 지나며 이런 철학강연에 심취하는 느낌은 묘한 지적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 좋은 카페와 술집을 두고 허름한 을지로의 인쇄골목으로 몰려드는 이들의 마음과 같다고나 할까? 모두가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지하철에서 철학책 한 권을 꺼내 읽고 있는 느낌이랄까?
  
'소요서가'는 대림상가 5층에 별도의 아카데미 공간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독서모임과 강연회를 진행한다.
▲ 소요서가 윤상현 대표의 칸트철학 강연 "소요서가"는 대림상가 5층에 별도의 아카데미 공간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독서모임과 강연회를 진행한다.
ⓒ 한준명

관련사진보기

 
소요서가는 대림상가 5층에 별도의 아카데미 공간을 운영한다. 강연을 진행한 윤상원 대표는 뜻이 맞는 이들과 이곳에 서점과 아카데미와 출판사를 차리면서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철학적 공간을 꿈꾼다.

짧은 시간 데카르트와 흄과 칸트에 이르는 서양철학의 정수를 빠르게 설명하는 그의 볼이 연신 발그레하다. 쉬운 질문에도 아주 어려운 철학 용어를 동원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도식화시켜 가는 그의 화법이 또 다른 지적 만족감을 더해 준다. 그가 꾸었던, 꾸어나갈 꿈들이 이곳에서 뜻밖의 꿈들을 만나 함께 영글어 나갔으면 좋겠다.

강연을 마치고 을지로와 종로와 광장시장으로 이어지는 '소요'는 덤이다. 칸트 철학의 심오함은 빠르게 잊히겠지만 이날 내 피부에 남은 가을의 촉감과 소리들은 기억되리라. '소요서가' 같은 철학서점을 알게 되었다는 내 천성의 지적 허영과 함께.

태그:#철학서점, #소요서가, #세운상가, #대림상가, #힙지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3년차 국어교사.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