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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자택에서 만난 아버지는 이태원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딸의 방 앞에서 딸과 함께 기르던 반려견을 안고 처음 소식을 접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22일 자택에서 만난 아버지는 이태원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딸의 방 앞에서 딸과 함께 기르던 반려견을 안고 처음 소식을 접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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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새벽 2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가 집을 착각했나...' 일요일이었지만 3시간 뒤 출근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53)는 잠을 이어갔다. 곧이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어? 뭐지?' 전화벨이 끊어질 무렵 가슴에 알 수 없는 무엇이 턱 얹혔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경찰서입니다. 1997년 ◯월 ◯일생 고○○ 학생 집 맞나요?"

"예, 맞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부녀의 현관문

끼이익. 현관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따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경찰서로 전화해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가셔서 신원 확인을 해야 한답니다."


경찰관은 이 말만 반복했다. 아버지는 생각했다. '시비에 휘말린 걸까?' 그것 말곤 딸(25)이 경찰서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추궁하자 경찰관의 입에서 '이태원'이란 단어가 나왔다.

"아니,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하세요. 다 큰 성인인데 무슨 신원 확인을 합니까?"
"이태원에서 사고가 나 따님을 병원으로 호송했답니다."


'이태원? 이태원에서 왜?' 전날인 토요일에도 일을 했던 아버지는 느지막이 집에 와 가볍게 식사를 한 뒤 곧장 잠을 청했다. TV를 켤 틈도, 휴대폰으로 뉴스를 볼 새도 없었다. 딸이 오후 6시 31분 보낸 마지막 메시지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메시지 끝엔 하트가 붙어 있었다.

"아빠 저 오늘 □□(친구)랑 같이 놀다가 □□네서 잘 것 같습니당ㅎㅅㅎ 오늘 집 올 때 조심해서 오십쇼♥"

경찰관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병원 응급실입니다. 고◯◯님 아버님이시죠? 언제 오세요?"

"네, 갑니다, 갑니다."
"따님이 다른 방에 가 있습니다."


'다른 방?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현관문을 나섰다. 주차장도, 차도 그대로였다. 아버지만 여느 날과 달랐다. 백 번, 천 번 운전했던 곳이었는데 가만히 서 있던 다른 차를 들이받았다. 메모장을 뜯어 연락처와 주소를 남기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고◯◯님 코로나19 검사결과 '음성'입니다.' 잠시 희망을 품었다. '얘가 살아있긴 하구나.'

병원에 도착했다. 딸이 가 있다는 '다른 방'은 영안실이었다. 2022년 10월 30일 동이 틀 무렵, 아버지는 우주를 잃었다. 

딸 방을 치우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딸의 사진을 집안 곳곳에 걸어 두었다. 사진은 딸의 성장기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빼곡했다. 얼마 전 한복을 입고 찍은 딸의 사진도 방에 걸려 있다. 그것은 딸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아버지는 딸의 사진을 집안 곳곳에 걸어 두었다. 사진은 딸의 성장기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빼곡했다. 얼마 전 한복을 입고 찍은 딸의 사진도 방에 걸려 있다. 그것은 딸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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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이 두드렸던 현관문. 평소 땀과 기름에 젖은 작업복을 입은 채 아버지가 들어오던 문이다.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달려가 볼에 뽀뽀를 했다.

"야, 아빠 씻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난 아빠 냄새가 좋아요!"


자신의 생일 때도 아버지에게 먼저 감사하단 말을 전하던 속 깊은 딸이었다. 참사 두 달 전 보내온 긴 문자메시지엔 딸의 애틋한 마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좋은 날에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큰 축복인 것 같아요. 항상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생일이라서 그런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이네요. 이런 건 문자가 아니라 편지로 써드려야 하는데 내가 글씨를 안 쓰다보니까 안 이쁘기도 하고, 이런 건 또 내가 부끄럽더라구~ 아빠랑 뽀뽀하는 건 하나도 부끄럽지가 않은데 말이야~"
 
이 문자메시지에서 딸은 "아빠는 하나뿐인 엄마·아빠이자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표현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남매를 키웠다. 첫 자식인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때부터였다. 어려서부터 형편이 넉넉치 않았다는 걸 안 딸은 아끼고 아끼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또한 아버지가 무리해서 일을 할까 항상 걱정했었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딸이 올해 생일에 아버지에게 보낸 장문의 문자메시지. 그는 자신의 생일에도 아버지에게 먼저 고마움을 표하는 속 깊은 딸이었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딸이 올해 생일에 아버지에게 보낸 장문의 문자메시지. 그는 자신의 생일에도 아버지에게 먼저 고마움을 표하는 속 깊은 딸이었다.
ⓒ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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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큰 병이 아버지를 덮쳤다. 골수암, 혈액암 등으로도 불리는 급성 백혈병이었다. 네 명의 골수이식 공여자가 나왔으나 모두 조직이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도 딸이 주치의 앞에서 한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딸의 결심 덕분에 아버지는 병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난 딸 때문에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데..."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울먹였다. 연신 가슴을 두드리며 "나보곤 건강하라고, 오래 살라고 해놓고... 지금이라도 (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어요"라고 되뇌기도 했다.

아버지를 반갑게 맞던 현관문 바로 앞에 딸 방이 있다. "아빠 냄새가 좋다"던 딸은 더이상 그 방에 없다. 이젠 아빠가 "딸의 냄새를 잊지 않기 위해" 그 방 문을 연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입었던 잠옷이 방에 곱게 개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 잠옷을 차마 세탁할 수 없다. 그 방을 정리할 수 없다.

남매가 일을 시작하고 특히 동생이 타지로 취직하면서 딸은 "아빠가 외로울까봐"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강아지를 품에 앉은 채 아빠는 딸이 머물던 방에서 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빠 일 좀 줄여요. 이제 저희도 컸으니 열심히 도울게요."
"아이고, 니들 잘 살 궁리나 해."

"이렇게 저희를 잘 키워주셨으니 아빠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어요. 난 아빠 껌딱지로 살 거야!"
"아빠 좀 그만 괴롭히고 시집이나 가라. 아빤 몇 년만 더 일하다 조용히 공기 맑은 데 가서 쉴 거야."

"그럼 나도 시집 안 가고 따라갈 건데요? 근데 아빠, 나 시집가면 울 거지?"
"울지, 안 울지 몰라도 있으면 데리고 와라."


딸과의 대화를 전하던 아버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질문
 
딸이 이태원 압사 참사 당시 소지했던 물건들. 검소했던 딸의 물건들은 경찰들이 건넨 유품 상자에 담겨 있었다.
 딸이 이태원 압사 참사 당시 소지했던 물건들. 검소했던 딸의 물건들은 경찰들이 건넨 유품 상자에 담겨 있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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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유품이 담겼던 상자.
 딸의 유품이 담겼던 상자.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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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묻고 싶은 게 많다. 누군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아버지는 오늘도 가슴을 움켜쥔다. 그는 "놀러 간 사람 잘못이다? 놀러 갔다 죽었다? 그럼 그곳에 놀러가지 뭐 하러 갑니까?"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이잖아요. 거기 와서 놀고, 먹고, 돈 쓰라고 특구로 지정해놓은 거잖아요. 많이 모일 줄 몰랐다? 미리 경찰을 배치했어도 해결될 문제 아니었다? 주최 측이 없었다?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어떤 누구든 어느 지역, 어느 축제를 가든 다 무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두 안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아버지는 그러한 말들을 잠재우기 위해 참사의 진실 규명과 책임 있는 이들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군가는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생각을 달리하도록 정부가 드러낼 거 다 드러내고, 인정할 거 다 인정하고, 책임질 것 다 책임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행정안전부 장관(이상민)부터 어땠어요? 경찰과 용산구청장(박희영)은 어땠어요? 처음에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자꾸 파보고 하나, 둘 진상이 나오니까 그제야 조금씩이나마 인정하고..."

평생 남매를 위해 일해 온 아버지는 "내가 광장으로라도 나가야 하나요?"라며 고개를 떨궜다.

"저는 무조건 딸내미 장례만 잘 치르자는 생각이었어요. 근데 자꾸 거짓이 나오고 덮으려는 모습이 보이고 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책임자들은 혹시나 자리라도 날아갈까 싶어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안 하고... 제가 집회에 나가 피켓을 들면 사람들이 선동한다고 그러겠죠? 저 평생 그런 곳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이에요. 그랬던 제가 지금 심정이 이래요."
 
참사 이후 돌아오지 못하는 딸을 기억하기 위해 매일 딸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아버지.
 참사 이후 돌아오지 못하는 딸을 기억하기 위해 매일 딸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아버지.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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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친구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주말이면 집으로 찾아와 위로도 하며 함께 밥도 먹으러 간다. 아버지는 이러한 딸의 친구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딸이 남긴 사진과 잘 정돈된 물품을 볼 때면, 이제는 딸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무너지고 만다.
 딸의 친구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주말이면 집으로 찾아와 위로도 하며 함께 밥도 먹으러 간다. 아버지는 이러한 딸의 친구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딸이 남긴 사진과 잘 정돈된 물품을 볼 때면, 이제는 딸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무너지고 만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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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틀 후 딸의 빈소에 윤석열 대통령이 찾아왔다. 앞서 누군가 조문을 하더니 "대통령 비서실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곧 대통령이 조문을 온다고 전했다.

"(그 사람이) 10분 후면 대통령이 도착한다고 그래요. 그제야 동의를 구하는 거예요. 뭐 어떡해요. 초상집 온다는데 못 오게 할 수도 없잖아요."

이후 약 3주가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가슴엔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켜켜이 쌓였다.

"누가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엇 때문에 잘못됐는지 꼭 밝혀주세요. 사전에 경고가 있었고, 당일 신고도 빗발쳤고, 일선에서 지원요청이 있었음에도 왜 그렇게 됐는지 꼭 밝혀주세요. 대통령이 믿고 앉혀놓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다가 대통령에게 불똥이 튈 것 같더라도 잘못한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전 세계가 지금 대한민국의 이 참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선진국? 이러한 참사에 다들 나 몰라라 하는 게 무슨 선진국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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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압사 참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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