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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형이 고통스러운 형벌인 까닭은 죽기까지의 고통이 지독하게 더디 진행되기 때문이요, 뱃구녁에서 빠져나가는 피로 인해 환장할 것 같은 갈증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고안한 형벌이었다. 십자가형보다 더 악독한 형벌이 있다. 무엇일까? 나는 고문사라고 생각한다. 

고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고문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실패다. 죽일 듯이 고문을 가하면서도 죽이지 않고 몸을 망가뜨리는 것, 그것이 고수의 경지이다. 고문에도 기술자가 있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악명을 떨친 고문 기술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근안이었다. 그는 입으로 딸아이의 재롱을 이야기하면서 손으로 전기고문을 했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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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한 권오설(1897~1930), 그의 몸은 고문으로 망가졌다. 1930년 7월 출소를 4개월 앞둔 시점에서 또 고문을 당했다.

감옥은 외롭다. 철창을 부여잡고 부모님을 생각하노라면 절로 눈물이 흐른다. 망가진 몸,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어야 하는 분이 겪는 외로움이란 무엇으로 표현할까? 1945년 해방을 앞두고 윤동주(1917~1945)가 숨을 거두었고, 이재유(1905~1944,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는 28세에 죽었다. 권오설은 33세에 죽었다. 이재유는 39세에 죽었다. 모두가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데 20세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10대의 청년이 옥사했다면 당신은 이 사실을 믿겠는가? 

스무살도 안 된 소녀가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1919년, 사건의 주모자들은 경찰서에 출두해 3년 형을 받았다. 그런데 주범도 아니고 종범도 아니고, 단순 가담자가 7년 형을 선고받았다면 당신은 이 사실을 믿겠는가? 감형이 돼 1920년 9월 30일 출소될 예정이었는데 그 이틀 전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니 당신은 이 사실이 믿어지는가? 

1919년 4월 1일 시골 아우내 장날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했던가 보다.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까지 이송됐으니 그렇게도 대단한 중범이었을까? 이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수들에게 제2의 고문을 당한 까닭은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8호 감방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것이었다.

형무소의 간수들이 데려다 얼마나 린치를 가했고 어떻게 고문을 가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죽기 전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퍼렇게 멍이 들었으며 살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고문으로 방광이 터졌고, 이후 패혈증세가 진행됐을 것이나 형무소는 죽어가는 수감자를 방치했고,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수감자가 숨을 거두자 마침내 형무소는 사체를 석방했다.

우리는 어려서 그의 이름을 기리며 이렇게 노래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중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번에 유관순(1902~1920)의 평전을 읽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법정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병천(아우내)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헌병이 쫓아와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19명이 죽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우리 부친도 살해됐습니다.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 하자, 나는 헌병에게 달려들어 발포를 제지했습니다." 

1919년 4월 천안의 아우내 시위에서 일경은 군중을 향해 총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1863~1919)씨가 총검에 옆구리를 찔려 숨을 거뒀다. 이어 어머니 이소제(1875~1919)씨도 사살됐다. 이 시위에서 유관순의 작은아버지 유중무도 체포됐고, 오빠 유우석도 연행됐다. 이럴 때 쓰는 사자성어가 풍비박산(風飛雹散)이던가. 

18세 시골 소녀가 감옥에 갇혔으나, 그녀에겐 찾아올 가족이 없었다. 어려서 당찬 아이였다. 아이들과 함께 술래잡기, 줄넘기, 얼음지치기를 하던 씩씩한 소녀였다. 커서는 키가 170cm나 됐고, 동정심이 많은 아가씨였다고 한다. 

3.1운동이 낳은 광주의 아픔
 
김범수 선생(자료사진)
 김범수 선생(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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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3.1운동이 낳은 천안의 아픔이라면, 3.1운동이 낳은 광주의 아픔이 있다. 이분은 경성의전(오늘의 서울대 의대)을 합격한 광주의 수재였다. 유관순이 1919년 3월 1일과 5일의 서울 시위에 참여한 다음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파급시켜 나갔듯이, 이분도 독립선언문을 품에 안고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의 인근 장성에 비밀 아지트를 마련하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광주로 운송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3.1운동의 거사는 이렇게 추진됐다. 100여 명이 구속좼고, 16인이 항소해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3년형이 1년6개월형으로 감형됐다. 옥중에서 민세 안재홍과 뜨거운 조국애를 교류했다고 한다. 이분의 이름은 김범수다.

1920년 말 출소한 청년 김범수는 곧바로 경성의전에 복학했다. 1924년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청년 김범수는 지체 없이 고향 광주로 내려와 의술을 베풀었다. 당시 현대적 의술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조선인들은 가난해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흙 묻은 신을 신고 오는 분들은 무상으로 치유하라"는 것이 김범수의 경영 원칙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해 몸소 옥고를 치르신 분, 돈보다 사람을 중히 여기며 인술을 베푸신 분이 있으니 이분에 대한 광주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는 지극했을 것이다.

일본인이 물러나고 새 나라를 건설하던 1945년 8월, 맨 먼저 만들어진 정치결사가 '건국준비위원회'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건준'은 이념의 좌우를 떠나, 민중의 존경을 받는 민족의 지도적 인사들로 구성됐다.

1945년 8월 17일 오전 11시 광주 사람들은 제국관(무등극장)에 모여 건준 전남지부를 결성했다. 위원장에 최흥종, 조직부장에 김범수를 선출했다. 김범수가 건준 전남지부의 조직부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1919년에서 1945년까지 그가 살아온 삶이 광명정대(光明正大)했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좌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국가보훈처는 김범수에게 서훈을 내리지 않고 있다. 김범수의 손녀 김행자(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기념역사관 관장, 1944년생)씨가 올해로 80세다. 손녀는 '왜 할아버지에게 서훈을 주지 않는지'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계묘년 설을 맞이해 광주의 요소요소에 손녀의 한(恨)을 게시했다. 

"정부는 왜 광주 출신 독립유공자에게 서훈을 하지 않는가? 김범수 선생, 장재성 선생, 정해두 선생, 이기홍 선생께 어서 빨리 서훈하라. 수백 명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들께 어서 빨리 서훈하라."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민주 세상의 대명천지에 무슨 이런 막된 짓이 자행되고 있다는 말인가? 3.1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신 분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신 분들께 서훈을 거부하는 국가보훈처가 있다니, 대체 어느 나라의 국가보훈처란 말이냐.

태그:#3.1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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