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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 지 18개월째다. 종종 그동안 쓴 글들을 돌아본다. 거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질문이 꼭 들어가 있다는 것. 질문은 나를 향하기도 하지만, 때로 세상을 향하기도 한다. 

매일 글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내 자신과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살기 위해 시작한 글이었다. 편안한 숨을 쉬기 위해 쓴 글이었다. 그런 글이 나를 자꾸 질문의 세계로 이끈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궁금한 걸까.

이십대 때 SNS에서 한 사진을 보고 멈춰선 적이 있다. 사진 속에는 사오십 대로 추정되는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와인잔을 높이 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들은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에 다들 퍼를 두르고, 반짝이는 장식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말끔한 외모에 명품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즐기는 파티 같아 보였다. 그 사진 아래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 늙고 싶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늙고 싶다. 젊고 파릇하지만 안정과는 거리가 먼 이십 대의 눈에 그 사진 속 인물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중장년층이 되면 청춘보다는 훨씬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며 화려함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자기가 번 돈을 쓰며, 자신의 부를 적당히 과시하며 사는 삶. 외제차를 끌고 널따란 아파트를 소유한 잘 나가는 어른. 나는 한때 그런 삶을 꿈꿨다. 그런 삶은 한번 다가오면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가야 할 나이에, 나는 내 주위의 타인들을 알아가느라 바빴다. 나보다 잘나보이는 사람들, 나보다 좋은 걸 가진 사람들을 쫓느라 나는 정작 나를 살피지 않았다. 때를 놓친 대가는 컸다. 

살아있는 한 꼭 한 번은 앓아야 한다는 듯, 뒤늦게 이십 대 후반이 되어 폭풍 같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살아온 모든 날들이 거짓 같았다. 허수아비처럼 살아왔다는 자책이 몸과 마음을 휘감았다. 그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 왜 있는가."

박해영 작가가 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써놓은 걸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중략)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는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윈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드라마가 끝나고도 이 내레이션은 오랜 시간 내 머릿 속에서 메아리쳤다. 거기에는 내가 수시로 스스로에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 들어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주인공은 신을 향해 물음을 던졌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 대상은 달랐지만 그 질문은 결국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된다. 구원.

기독교에서 구원은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내는 일을 일컫는다.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은 결국 내 자신에게 손길을 뻗는 행위였다. 나는 그 질문들이 껍데기 같았던 내 삶을 구원했다고 믿는다.

이제 나는 사진 속 화려함을 꿈꾸지 않는다. 정확히는 순간의 화려함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중년이 된 나는, 인생이라는 게 어느 순간 안정이라는 깃발을 꽂고 이제부터는 무조건 평탄하다고 외칠 수 있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 편한 인생은 없으며, 내가 꾀할 건 그저 평온한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평온한 내가 되는 길은 결국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하는 한 인간이 되는 것. 그러니 글을 쓰며 질문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여전히 내가 궁금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알고 싶다.

질문을 한다는 건 곧 살아있다는 증거다. 질문을 하지 않는 삶은 죽어있는 것과 같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영혼이 죽어있는 삶인 것. 의문도 질문도 없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에서는 만족을 찾기가 어렵다.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걸 선택했을 때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삶이 쳇바퀴 같더라도, 내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면 그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는 것. 나를 알아야 선택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선택이어야 살아갈 의지가 생기고 비로소 자유에 가닿는다. 그러니 질문을 멈출 수는 없다.

질문은 계속 되어야 한다. 누구의 삶이라도 그렇다. 질문은 본질에 가까운 것일수록 좋다. 본질을 벗어난 질문은 삶을 오히려 방황의 늪에 빠뜨린다. 본질에 가까운 질문일수록 쉽게 답할 수 없다. 사람들은 보통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말을 흐리거나 회피한다.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 

글을 쓴다는 건 용기내어 질문을 맞대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는 계속 글에서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신을 믿지 않는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신 대신 스스로에게 묻는다. 질문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르니, 나를 향한 물음은 계속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에 왜 있는가.

태그:#구원, #질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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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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