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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무섭다 어두워지는 눈이 무섭다
의사의 만류에도 삶의 낙이 이것뿐이라고
어머니 철필로 점자 불경 닥종이에 옮겨 새기신다
해진 열 손톱 끝에 봉선화 꽃물 번져 간다
시치미 떼고, 연옥을 찾아가는 단테같이
주문(呪文)을 하얀 닥종이에 새긴다
어디선가 찌르르 스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잘 알아보면, 점자별과 통신을 하는 소리...
제 심장에다 나이테를 나무들이 새기듯이
더듬더듬 감은 눈으로 무얼 쓰고 싶은 것인가
오늘 만나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답답한 마스크 끼고 앉아서 철필로 만다라 새긴다
결국 시작과 끝이 만나서 바람에 털리고야 말
모래 만다라처럼, 빈손은 백지로 돌아온다
그래도 자꾸 점자별이 되고 싶어
만다라 속을 수놓는 오롯한 점자의 시간
- 시 "점자 숲 오목눈이 교실3" 부분.
 
송유미 시인의 새 시집 <점자 편지>(실천문학사 간)에 실려 있는 시다. 점점 시력이 약해지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시인을 통해 독자들한테도 전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우주를 상징하기도 하는 만다라처럼 여겨진다.

자꾸만 어두워지는 눈으로 '삶의 낙이 이것뿐'이라며 '점자 불경 닥종이'를 옮기는 어머니의 심경이 '오롯이' 살아 있다. 여성의 삶에 담긴 슬픔을 시라는 형식 안에 '점자'를 새기듯 독창적 이미지로 형상화 시켜놓은 시다.

송유미 시인이 여섯번째 펴낸 이 시집에는 57편이 실려 있다. 생의 싸늘한 잿더미 속에서 발견한 불씨 같은 성찰에 치열하고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시들이다.

오랜 기간 삶과 시를 쓰는 행위를 밀착시키고자 했던 시인은 <점자 편지>를 통해 시가 말의 유희나 언어의 향연이 아닌 삶의 양식임을 보여준다.

'시를 쓴다'는 행위에 대해 그는 "생과 사가 반복되고 소멸하고 탄생하는 것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한 견의 시선으로 세상에 드리워진 정체불명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 역전, 우리, 공형(孔兄), 새벽 댓바람부터 병나발 분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소주병 속으로 질주하는 KTX가
푸른 바다에 풍덩 빠질 무렵이면
뱃살 출렁이는 몸뚱이도 바닥이 나겠지
바닥 새들 비상하겠지
바닥을 모르면서 바닥을 노래하는 것도 싱거운 일이지…
너는 뭐 그리 바닥을 잘 아냐고
원효 도사 천 원 한 장 주면 성불시켜준다고 손바닥 내민다
- 시 "소주병 속에 비둘기가 산다-서울역" 부분
 
생각이 기발하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빈 병 속으로 옮겨놓았다. 허상으로 채워져 있던 것들이 바닥나면서 드러나는 '서울'의 밑바닥에는 '바닥을 모르면서 바닥을 노래하는 것'이 '싱거운 일'이 되기까지 굴러다닌 '바닥 새'들의 영혼이 읽힌다.

병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어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서울'은 갇혀 있다는 생각에 갇히게 만드는 도시이다. '천 원 한 장'에 성불할 수 있다는 노숙자의 말이 지금 '서울'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철거지역, 노인 병원 영안실 앞에는
버려진 구두가 꽃잎처럼 지천이다
장거리 문상객을 위해서일까 붉은 다라이 신발 신은
배롱나무 그늘 아래 그가 누런 삼베 두건을 쓰고
밤을 새워 검정 구두를 별빛처럼 닦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갓집으로 모여드는 것은
구두만 아니라 국화꽃도 지천이다
검정 구두와 하얀 꽃의 성스러움은 두 말이 필요 없지만,
곡비가 사라진 마당에
상(喪)예의가 너무나 소홀해서
떠나는 자는 절대 울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배롱나무 구두 병원으로 맨발들 모여들고" 부분
 
송유미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세상 모든 것이 시를 돕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시들이 삶을 돕고 있습니다. 잠시 내 시가 작은 먼지처럼 빛을 돕기를 서원해 봅니다"라고 했다.

김선준 작가는 송 시인의 시에 대해 "송유미가 창조한 시공간은 익숙하지만 낯설다. 기차역, 시장, 전시회 등 평범한 현대 사회의 공간들이 날카롭게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낯설지만 치밀하게 구성된 환상 공간이 탄생된다"며 "그의 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언어가 살아 숨 쉬고, 현실 속에 묻혀진 밑바닥의 아픔과 슬픔이 황금 비율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리운 기억 저편의 시공 간 등을 구축한다. 점자처럼 숨은 이미지를 읽는 촉감에 땀방울 맺힌다"며 "<점자 편지>는 오랜 시간 철필로 새기는 점자처럼 치성스럽다. 시 언어가 만들어 내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의 지평이 될 선구적 작품이다"고 했다.

송 시인은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당나귀와 베토벤>,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 <당신, 아프지마> 등을 펴냈고, 전태일문학상, 수주(변영로)문학상, 김민부문학상, 김만중문학상을 받았다.  
 
송유미 시집 <점자 편지>.
 송유미 시집 <점자 편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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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송유미 시인,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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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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