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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구에서 제공하는 진학상담을 하러 갔다. 상담일이 토요일이어서 아이는 친구와 놀 시간이 줄어든다고 처음엔 탐탁하지 않아 했다. 할까 말까 싶을 땐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이번에 안 하고 넘어가면 앞으로도 아쉬움이 남을지 모르니 한번 가보자고 아이를 설득했다. 일단 가보면 가길 잘했다는 결론이 나든, 앞으로 이런 상담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나든 할테니 그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아이가 먼저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나중에 엄마를 상담실로 불렀다. 아이가 요리에 흥미가 있다고 하는데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게 뭐든 그걸 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다만, 아이가 요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매일 부엌에서 뭘 해보려는 건 아니고, 어디선가 무슨 만화 같은 것을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그냥 지켜보고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럴수록 아이가 그걸 접할 기회를 주고 정보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해보니 내 생각과 다르네'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같은 요리 만화나 콘텐츠를 봤다고 우리 아이처럼 모두가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거다. 아이에게 뭔가가 느껴진 거고, 우리는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상담 선생님이 나와 아이를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가 아이에게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이가 무엇을 위해 그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반짝이는 뭔가를 주지는 못했구나.

'동기부여'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아이가 마음에 품고 달려갈 이유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은 채 '일어나면 창문의 블라인드부터 걷어라', '할 일을 먼저 해라' 같은 매일의 루틴만 강조했구나 하는 반성.

상담을 받은 후 아이는 공부에는 별 생각이 없었고 나도 수도권에 어떤 요리 특성화고가 있는지 이름만 몇 개만 기억한 후 그 상담을 받았던 사실도 잊고 있었다.

아들의 선언

그러다 연말을 맞았다. 우리는 연말이면 가족끼리 송년회를 하면서 각자 자신의 한 해를 키워드로 정리해보고 다음해 이루고 싶은 목표를 나눈다. 그때 아들이 요리 특성화고에 가고 싶으니 조리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선언했다.

나가서 친구와 놀겠다, 게임을 하겠다 이외에 정기적으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어서 무조건 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저 아이가 뭔가를 위해 노력할 반짝이는 이유를 찾았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연말 연휴가 끝나자마자 근처 요리학원 자격증 반에 등록을 했다. 첫날 학원에 다녀온 아이는 무거운 짐을 들고 왔다. 앞치마, 칼, 계량 스푼, 행주, 뒤집개, 심지어 프라이팬까지. 학원에 갈 때마다 들고가야 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학원에 사물함을 하나 등록해서 넣어두고 다니게 해도 되고 비닐봉지에 들고 다니게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아들을 위해 가방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누가, 무엇을 넣을지 모르는 가방이 아니라 내 아들이, 조리 도구를 넣어다니기에 딱 맞는 가방을.

프라이팬의 지름을 재고, 가방 한쪽 면에 조로록 도구를 꽂을 주머니의 크기를 가늠해본 후 가방의 크기를 정했다.
 
들어갈 도구에 딱 맞는 주머니로
 들어갈 도구에 딱 맞는 주머니로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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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구상하고 만드는 동안 아이에게는 학원에 다녀오면 양파와 당근, 감자를 썰어달라고 했다. 마치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떡을 썰 테니' 했던 한석봉 어머니처럼 '너는 야채를 썰거라, 나는 가방 만들 테니' 였다고나 할까.

요리를 가져오지 않는 이유

마침내 가방을 완성해서 아이에게 건넸다. 그 가방을 들고 아이는 방학 내내 매일 학원에 가서 두 가지씩 요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만든 음식을 가져오지 않기에 사정을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만들자마자 버리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 싶으니 꼭 가져오라고 했다.
 
조리사자격증 학원 준비물 가방
 조리사자격증 학원 준비물 가방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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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속에서 튀고 싶지 않았던 아이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밀폐용기를 챙겨가서 만든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자격증 시험 요건에 맞게 소량을 요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도 얼마 되지 않고 집에 들고 오면 요리학원에서 갓 완성했을 때와는 달리 초라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학원에서 그걸 만들어 올 때 쯤이면 나는 식사가 끝났거나 막 이를 닦고 난 후였다. 더구나 교정을 하고 있던 때여서 뭔가를 먹는 일이 불편했다.

아이는 만들어온 음식을 내놓기도 볼품없다 싶었던지 점차 요리를 완성한 후 사진을 찍고는 학원에서 먹었다며 들고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엄마아빠는 내가 만든 음식에 관심이 없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아뿔싸 싶었다. 내가 바느질을 계속 하게 했던 원동력이 바로 그 옷을 입어주는 사람들의 인정이 담긴 말, 자주 입어주는 모습이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장 이 가방을 만들 때만 해도 아이는 칼집을 따로 만들어준 것에 환호했고, 각각의 도구가 제자리를 가지고 있는 주머니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내주지 않았던가. 

진심을 담은 말 한 마디
 
아들이 만들어 준 시저샐러드
 아들이 만들어 준 시저샐러드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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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들어줄 수 있는 메뉴가 있는지 물었다. 시저 샐러드라는 답이 나왔다. 집에 없는 재료는 엔초비 하나였다. 엔초비는 한 번 열면 다 먹어야 하니 소량으로 사라는 팁을 얻어 가장 작은 용량으로 주문했다. 딱 때 맞춰 만들어낸 시저샐러드를 엄마아빠가 손가락으로 소스를 훑어가며 흡입하는 것을 본 아이는 흡족해했다.

가방을 만들어준 건 좋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더 필요했던 건 아이가 만들어 온 음식을 내놓을 때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맛있게 먹는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아이가 필요하다는 식재료를 부지런히 채워놓고 아이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아이의 관심사를 응원해주려 한다.

아이가 자격증을 못 딸 수도 있고, 요리고등학교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이 아이의 운명이기라도한 양 호들갑을 떨며 한껏 누려보려 한다. 자기가 만들어준 음식을 즐겨 먹었던 가족들과의 추억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워킹맘, #부캐, #워킹맘부캐, #바느질,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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