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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OOO마트에서 장을 본다.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열흘에 한 번꼴로 찾는다. 집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 멀지는 않지만 아파트에서 지낼 때보다는 자주 오지 않게 된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식품 코너에는 봄철에만 볼 수 있는 색다른 초록잎들이 눈에 띈다. 쑥, 원추리, 머귀 같은 봄나물에 미나리, 부추가 한창이다.

메모해 둔 것들을 카트에 먼저 담은 후 한 바퀴를 더 둘러본다. 딸기가 제철이다. 알이 좀 작은 것들은 가격이 싸다. 그냥 먹을 것은 굵은 놈으로 사는 게 좋지만 딸기청이나 냉동으로 보관할 용도라면 굳이 크지 않아도 된다. 3킬로그램을 샀다. 일일이 꼭지를 따고 자르는 것은 귀찮지만 여름내 시원하고 고급진 딸기 라테나 에이드가 되어 준다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간다.

흙 묻은 쪽파
 
마당에서 쪽파를 다듬는 모습
▲ 쪽파다듬기 마당에서 쪽파를 다듬는 모습
ⓒ 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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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한쪽에는 쪽파가 잔뜩 쌓여 있다. 할인 중이라 가격이 착하다. 남편과 나 둘  다 파김치를 좋아하니 절로 눈길이 간다. 갓 버무린 파김치는 삼겹살과 궁합이 잘 맞고 잘 익힌 파김치는 집 나간 입맛을 불러오는데 한몫한다.

살까 말까 잠시 망설인다. 쪽파 다듬는데 시간과 품이 꽤 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가격이라면 두고 가긴 아깝다. 그도 흘깃흘깃 쪽파를 쳐다본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품새가 짜장라면에 잘 익은 파김치 한 가닥 얹어 먹는 생각이나 해물파전을 기대하는 것 같다.  
     
"파김치 담글까?"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편은 성큼성큼 앞질러 가더니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쪽파 봉지를 들어 보인다. 한 봉지가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김치를 담그려면 몇 봉지를 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그는 계속 다듬어 놓은 쪽파를 기웃댄다. 흙 쪽파보다 몇 배가 비싸다. 흙 묻은 쪽파를 사면 함께 다듬자고 할 테니 귀찮아서겠지. 하지만 나는 알뜰한 주부는 아니고 시간이 남아도는 주부니 흙이 잔뜩 묻은 쪽파를 샀다. 그가 같이 다듬겠다 말하지만 딱히 믿음은 가지 않는다.

야외 테이블에 신문지를 펼쳐 놓고 파를 다듬는다. 어느새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이 어깨에 내려앉아도 시리지 않은 계절이다. 그는 텃밭에서 시금치와 겨울초가 있던 자리를 일구고 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지만 미리 거름을 넣고 이랑을 만들어 봄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쪽파 다듬기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된다. 사서 고생이란 생각을 잠깐 해보다 뿌리부터 먼저 자른 후 하나하나 다듬기 시작한다. 바람에 파 밑에 깔아 둔 신문지가 펄럭이면서 흙먼지를 날린다.      

아이고, 내가 파김치 되겠네

시장에 가면 주로 노점상이나 어르신들이 다듬은 쪽파를 판다. 손님이 없는 사이사이에 파를 다듬거나 도라지를 까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듬어 놓은 쪽파나 껍질을 벗겨 먹기 좋은 크기로 쪼개 놓은 도라지는 가격에 비해 양이 적다.

다소 비싸다 싶어 망설이는 내게 주름진 얼굴에 마디 굵은 손으로 한 줌을 더 얹으며 사기를 권한다. 직장 다닐 때는 시간도 몸도 아껴야 하니 종종 다듬어 놓은 것을 샀다. 양이 꽤 되겠다 싶어도 막상 반찬을 만들고 보면 '애걔' 할 정도다.   

지난겨울 아래 집 언니에게서 도라지 한 묶음을 얻었다. 껍질을 까지 않은 통 도라지다. 통 도라지를 식탁에 올리려면 껍질을 벗기고 자르고 쪼개야 한다. 손이 많이 간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익숙지 않아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도라지 몸통을 칼로 쓱쓱 긁다 보니 껍질이 식탁과 바닥 여기저기에 튀어 너저분하다. 도라지 껍질 벗기다 내 영혼도 흩어질 뻔했다.

명절이나 손님상에 필요한 경우 팩에 들어 있는 깐 도라지를 샀다. 한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어떻게 요리해도 아쉬웠다. 얻어온 도라지는 껍질을 다 벗기면 제법 넉넉하겠다. 손질에 싫증이 난다 싶을 즈음 드디어 봉지 밑바닥이 보였다.

먹기 좋은 크기로 쪼개져 뽀얗게 변한 도라지가 소쿠리에서 다소곳하게 기다린다. 참을 인 셋이면 도라지가 한 바구니다. 말끔하게 목욕 재계한 도라지로 새콤달콤 초무침과 들기름 향이 은은히 밴 도라지볶음을 했다. 한 젓가락씩 듬뿍 집어 아끼지 않고 먹는 곁님에게 이게 다 내덕인 줄 알라며 생색을 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파김치나 파전, 김장 등 많은 양의 파가 필요한 경우 흙 쪽파를 산다. 몇 번을 해도 쪽파 다듬는 일은 여전히 번거롭다. 오늘도 의자와 테이블 높이가 맞지 않아 자세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어깨도 아프고 며칠 전부터 시원치 않은 허리도 결린다. 방석을 깔아보니 좀 낫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눈을 찌르고 콧물까지 흘러내린다. 깐 쪽파가 비싸다는 생각은 이미 지워 버린 지 오래다. 쪽파 다듬다 내가 먼저 지쳐 파김치가 될 것 같다.    

노력과 정성 없는 일은 없다
 
완성된 파 김지
▲ 파김치 완성된 파 김지
ⓒ 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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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노동가치가 자신이 하는 일보다 낮다고 여긴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의 노동 가치를 폄훼해서도 안 되고 그 일이 쉽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 쪽파나 도라지 까는 일만 해도 그렇다.

직접 손으로 다듬어 보지 않으면 그 일의 고단함과 번거로움을  알 수 없다. 고개를 숙이고 다듬노라면 어깨와 목이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 손톱은 원치 않는 흙빛 네일아트가 된다. 먹기 좋게 잘 다듬어 놓은 채소가 비싸다는 생각은 넣어 둬. 넣어 둬.

텃밭의 상추 한 포기도 노력과 정성 없이는 어림없다. 먹거리를 키우고 만들고 다듬는 일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담고 있는 일이다. 어떤 날은 자신이 될 수도 또 다른 날은 지인이나 소비자가 될 수도 있다. 대가를 지불하는 것만으로 당당하다 여긴 나는 겪어 보고서야 비로소 그 일의 만만치 않음과 고마움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값진 노동이 내게 와서 나는 먹고 입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이제 파김치를 담글 차례다. 온갖 정성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대충 슥슥 빨리빨리 끝내기로 한다. 찹쌀풀을 쑤기 번거로워 냉장고에 몸을 숨기고 있는 찬밥 한 덩이를 찾아낸다. 대놓고 섹시미를 뽐내는 양파와 부끄러워 하는 찬밥을 함께 넣고 갈아 찹쌀풀을 대신 한다.

고춧가루와 매실액, 젓갈과 참치액을 넣어 김치 양념을 완성한 대야에 쪽파를 담고 머리부터 양념을 바른다. 세게 치대듯이 하면 쪽파 머리가 놀라 요동치니 살살 달래듯이 바른다. 한가닥을 돌돌 말아 입에 넣어 보니 간이 딱 맞다. 생으로 먹어도 맛나니 익히면 한층 깊은 맛이 나겠지. 벌써부터 짜장라면에 잘 익은 파김치 한 가닥 올려 먹을 생각으로 '츄릅' 입안에 침이 고인다.
 
짜장라면과 잘 어울리는 익힌 파 김치로 한 끼 식사
▲ 짜장라면과 파김치 짜장라면과 잘 어울리는 익힌 파 김치로 한 끼 식사
ⓒ 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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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brunch.co.kr/@dhs9802에도 실립니다.


태그:#파김치, #노동, #쪽파 다듬기, #도라지까기, #짜장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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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생활을 하며 은퇴 후 소소한 글쓰기를 합니다. 남자 1, 반려견 1, 길 고양이 3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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