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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암이었다. 암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개발이 예정된 토지와 아파트 한 채를 팔고도 암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제는 병원에 있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는 순간에도 의사는 새로 들어온 치료법을 소개했다. 이 치료를 받으면 지금보다는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말했고 어머니는 울며 사인했다.

당시엔 연명치료라는 개념도 없었다. 의사의 말이 법이었고 사람은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돈이 있으면 환자의 의지에 관계없이 치료를 시작했고 의사의 판단 없이는 환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치료를 멈추지 못했다. 환자가 있는 가족의 생활고나 고통은 치료 중단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늘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셨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이었나, 병원에서 집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퇴원을 허락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때도 집으로 올 수 없었다. 오랜 항암치료로 체력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끔찍하게 여기던 병원에서 결국 돌아가셨다. 

죽음에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는 나의 몸이 견뎌야 할 고통을 선택하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나의 몸이 견뎌야 할 고통을 선택하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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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병원 장례식장에서 염을 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봤지만 시체가 된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안온하다고 느꼈다. 시체를 씻기고 베옷을 입히는 과정을 지켜보며 드디어 어머니를 잠식하던 10년의 돌봄 생활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 치료를 멈춰달라고 말하던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며 어머니를 옥죄던 친척들이 모여 앉았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아버지)을 가족묘에 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에 집착하던 어른들의 기묘한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에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마지막은 달랐을까?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해 있기에 잘 죽는 것은 잘 산다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고독한 자살이나 고통스러운 질병사(거부할 수 없는 치료로 고통이 증폭되는 과정을 목격한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치료사라고 부르고 싶다)로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죽고 싶다.

자는 듯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한다. 축복받은 소수의 호상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호상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알 수 없는 시기에 맞이하게 될 죽음을 두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삶의 수준에 관계없이 죽음은 비루하지 않았으면 한다.

왜 죽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은 공감이다. 우리에겐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도 있지만 잘 죽을 권리도 있음을, 나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소중하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죽음의 질은 곧 마지막 삶의 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발달한 의료 수준에 비해 죽음의 질이 낮다. 76%가 '병원 객사'를 하는 현실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이가 드물다. 지금도 수많은 환자들이 가족들과 마무리할 시간도 없이 통증을 견디다 세상을 떠난다. 정답은 없다. 스위스처럼 안락사를 전면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연명의료결정법, 소극적 안락사, 적극적 안락사, 조력자살 이런 용어 때문에 마치 죽음에도 제도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모두가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 걸 의미한다. 어떤 것이 존엄한 죽음인지 우리 사회가 성역 없이 고민하고 토론해봤으면 한다. -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 유영규, 임주형, 이성원, 신융아, 이혜리 / 북콤마 / 2020

2016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단계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에 따라 연명의료결정제도가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최근 6개월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현황. 2018년 3월 집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출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누리집)
▲ 월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등록 추계 최근 6개월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현황. 2018년 3월 집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출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누리집)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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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누리집을 통해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관련 정보를 얻고 가까운 기관에 방문하여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2023년 6월 14일 기준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는 1,813,519명이다.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기나긴 투병 생활을 보며 나는 치료 없이 질병의 자연사에 맞춰 조용히 소멸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암 덩어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몸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병상을 전전하다 죽고 싶진 않았다.

어느덧 아버지보다 더 많은 생을 살게 되었고 40대에 접어들며 크고 작은 질환을 갖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 적은 없지만 국소마취를 해야 하는 몇 차례의 작은 수술이 있었고 암은 아니지만 염증과 관련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
 
해마다 꽃의 죽음을 본다. 나의 죽음도 꽃처럼 아름다우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목련이 지는 모습 해마다 꽃의 죽음을 본다. 나의 죽음도 꽃처럼 아름다우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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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날수록 약해지는 몸을 인지할 때마다 생의 마지막 날을 상상했다. 병원이 아닌 정성스레 돌본 나의 집에서 잠자듯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증질환의 경우 질병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다가는 것이나 질병을 치료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으니 이왕이면 치료를 받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나의 몸이 견뎌야 할 고통을 선택하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싶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마쳤음에도 부족함을 느낀다.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이 더 많아질 순 없는 것일까. 존엄하게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법은 무엇인지, 죽음을 위한 법을 바라보는 사회의 이해력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느낀다.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장한다. 나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정도는 갖춰놓고 나이 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연명의료의향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의 단계로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질환에 걸리거나 신체적 기능이 현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인간적인 욕구와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야 할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삶의 모든 순간에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죽음을 떠올렸을 때 우울해지거나 두렵진 않았으면 한다. 죽음이 존엄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에서 잘 죽고 싶다. 한철 화려하게 피고 죽음을 맞이하는 꽃처럼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

태그:#사전연명의료의향서, #죽음, #존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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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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