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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복지원에 다닌다.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여덟 명의 아이들을 세 시간 동안 가르친다. 대부분 개별 학습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한 명에게 돌아가는 시간은 20분 내외이다. 녀석들은 나를 '문해력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 호칭이 싫지는 않다.

교실로 들어가려면 사무실을 거쳐야 하기에 직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작년에는 형식적으로 인사했는데 올해는 반기는 눈빛이다. 매번 원두커피도 빼놓지 않는다. 주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다.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면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큰 종이컵 가득 담겨 있어서 여유 있게 마실 틈이 없다. 아이들이 금세 들이닥치는데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한 번은 한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날보다 더 빨랐던 것이다. 한가롭게 마실 수 없어서 바깥 창가에 있는 낮은 책꽂이 위에 컵을 놓아두었다. 쉬는 시간에 마실 요량이었다.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1학년을 먼저 가르쳤다. 학년이 다르고 수준 차가 나서 동시에 할 수 없어서다. 그런 다음 과제를 내주었다. 이동식 칠판에 낙서하지 말고 과제를 잘하라고 당부하고 다른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그만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학년 아이가 공부하다 말고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표정과 눈길이 이상했다. 1학년 녀석을 보라는 눈치다.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낙서하다가 컵을 넘어뜨린 것이다. 바닥에 엎질러져 있는 커피를 보자 화가 치솟았다.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이 녀석이"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미안했던지 "잘못했어요."라고 한다. 빗자루나 걸레는 물론 쓰레기통도 없는 작은 방이다. 다행히 구석에 쓰다만 두루마리 화장지가 있어서 그것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고 느끼는지 늘 싱글벙글거리는데 그 아이를 보면 나도 즐겁다.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고 느끼는지 늘 싱글벙글거리는데 그 아이를 보면 나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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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이들을 3월 중순부터 5월까지 가르친 다음 평가했다. 문해력 지원팀에서는 1년을 3학기로 나누고 학기가 끝나면 평가해서 목표에 도달한 아이는 상위 반으로 편성한다.

20회기라지만 첫 시간과 마지막 평가 시간을 빼면 사실상 열여덟 번 가르치는 셈이다. 늘 그렇듯이 이런 날이면 가르치는 교사도 긴장한다. 지도 내용과 방법이 적절했는지 그 결과가 말해주는 것 같아서다.

걱정과는 달리 여덟 명 모두 실력이 나아졌다. 그중에 두 명의 향상도가 도드라졌다. 2학년 아이는 한글을 해득해서 이제 유창하게 읽기를 공부한다. 3학년은 정확하게 읽는 게 눈에 띄게 좋아졌다. 두어 번 연습하면 술술 잘 읽는다.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고 느끼는지 늘 싱글벙글거리는데 그 아이를 보면 나도 즐겁다.

6학년 쌍둥이 형제는 재미있다고 늘었다며 계속 같이 하기를 원한다. 시험을 잘 보면 독해력 반을 졸업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한 녀석이 "그럼 억지로 틀려야겠네요?"라고 말해서 웃고 말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힘들었다. 학교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언제 끝나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들이라 그러려니 하다가도 기운이 빠졌다. '잘 읽는 편인데 읽는 공부를 왜 더 해야 합니까?'라는 표정과 '나이든 선생님이 뭐 얼마나 잘 가르치겠어?'라는 태도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ㅎ'을 가리키며 "이 자음은 '히읃'이라고 읽어야 돼"라고 하면 "아니에요. 우리 선생님이 '히흥'이라고 했어요"라며 받아칠 때는 아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극적이고 못 미더워하는 면은 많이 줄어들었다. 신뢰가 조금씩 쌓였나 보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 이제 수업의 패턴이 생겨서 가르치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아이들도 얼마만큼의 양을 어떻게 공부할지 알기에 '오늘은 하기 싫다'라든가 '빨리 끝내 주세요'와 같이 거슬리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성향도, 특기도 제각각인 아이들이 같이 생활하다 보니 이런저런 일로 티격태격할 때도 많다. 한창 부모 품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서 생활하는지 모르지만 내 작은 노력이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는 데 징검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해력은 공부의 기초 체력이나 다름없다. 학력은 글을 읽고 이해해야 길러지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모두 올해 안에 목표로 세워 둔 읽기 실력이 탄탄히 다져졌으면 좋겠다.

태그:#문해력, #성장, #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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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에서 37년 6개월 교직 생활하다 작년 8월 말 퇴직함. 수필집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 출간. 목포대평생교육원에서 일상의 글쓰기 공부를 수년째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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