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지난 5월 1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 5월 1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 연합뉴스

 
문화예술이 정치적 외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건 정언명제에 가깝다. 국내 최대 영화 축제인 부산국제영화제 역사의 상당 기간은 바로 그 외압과의 투쟁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주요 영화제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데엔 바로 그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온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력과 영화인들의 연대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또다른 위기를 지내고 올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려던 부산영화제가 또 다른 논란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치적 외압이 아닌 다른 형태의 외압 때문이다. 그간 사무국 운영과 프로그램 전반을 책임진 집행위원장 체제를 이원화하기 위해 집행위원장과 운영위원장으로 나누겠다는 복안을 발표한 직후부터다.

이사회를 거쳐 지난 5월 9일 총회에서 최종 통과된 안건대로 현 집행위원장이었던 허문영 위원장 곁에 조종국 위원장이 신임 운영위원장으로 위촉됐다. 그런데 일부 영화인들과 영화 단체가 반대 성명서를 내며 상황이 혼돈 속으로 빠졌다.
 
목소리를 낸 영화인들 중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 외압 피해를 봤던 '블랙리스트' 피해자들도 있고 <다이빙벨> 상영으로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을 비롯해 정부 차원의 압력을 겪은 부산영화제와 연대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조종국 위원장의 사퇴를 외치며 부산영화제를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지난 6월 26일 임시총회에서 조종국 위원장의 해촉 건을 비롯해 집행위원장 및 운영위원장 사고 시 직무대행 체제를 위한 규정도 개정했다.
 
목적을 넘어버린 수단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지난 5월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임시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입장하고 있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지난 5월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임시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적어도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돌연 사임이 큰 영향을 준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총회 직후 허 위원장이 사퇴하면서 남긴 발언은 "심신이 지쳤다. 떠나는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정도였고, 이로 인해 각종 추측이 시작됐다. '조종국 위원장 위촉 건에 충분한 교감이 없었다', '사실상 이원화 체제에 반대했다', '조종국 위촉 자체를 반대했다'는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그간 입장 표명이 없던 조종국 위원장을 <오마이뉴스>는 직접 만났고, 그도 작심한 듯 여러 발언을 쏟아냈다. (관련 기사: 조종국 부산국제영화제 운영위원장이 밝힌 논란의 전말). 핵심은 그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시절, 혹은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 시절 부산 영화인과 일부 영화 단체와 소통 문제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청탁성 혹은 어떤 요구 등을 단호하게 대처한 사실이 갈등의 원인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재임 시절 횡령이나 배임, 법규 위반 등의 문제가 벌어진 게 아니었다. 부산영화제 정관상 3대 해임 사유에 들지 않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영화인들은 왜 그렇게 조종국 운영위원장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던 것일까. 정지영 감독, 오동진 평론가, 제작자 이준동 대표 등이 SNS 등에 올린 글들을 보면, 이용관 이사장의 부산영화제 사유화 우려를 강하게 표하며 조종국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이 주였다. 

현 이사진을 중심으로 혁신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꾸린 것이 잘못이라거나(정지영 감독), 조종국 위원장 선임을 박형준 부산시장의 측근 선임으로 비유해 이용관 이사장의 사유화를 비판하거나(이준동 대표), 현 오석근 부산영화제 마켓운영위원장, 강승아 부집행위원장도 거취를 고민해야 한다는(오동진 평론가)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SNS에 이런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영화계에 이른바 헤비 스피커(Haevy Speaker)로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사실관계 파악과 함께 부산영화제를 떠받치고 있는 특성들을 감안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름 아닌 이런 논의의 전제인 영화제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 사태 때는 명실공히 압력의 주체가 정치권이었고, 권력자였다. 문화행사를 정치 논리로 옥죄려는 것에 자율성과 독립성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부산영화제 사태에 개입하는 명분은 과연 무엇일까. 이용관 이사장의 사유화라는 명분, 조종국 위원장이 그의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따지고 보면 허문영 집행위원장도, 그리고 현 프로그래머들 또한 이용관 이사장 체제에서 승진하고, 발탁된 '그의 사람들'이다.
 
코드 인사 논란을 떠나 해당 인물들을 평가하고 조치를 취할 주체는 부산영화제지, 외부 영화계가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단체 성명 혹은 공개 압박을 취하는 지금의 흐름은 애써 함께 지켜온 한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상처를 주는 또다른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체가 거세당한 논쟁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 부산영화제 제공

 
또 하나의 문제점은 과연 신임 운영위원장의 청사진과 비전을 영화계는 충분히 청취했을까 하는 데 있다. 5월 9일 총회 직후 바로 출근한 뒤 조 위원장이 한 일은 내부 스태프들 면담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1인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프로그래머로 대표되는 영화 선정위원회의 권한이 막강한 것에 알게 모르게 내부 불만이 쌓였고, 조 위원장은 프로그램 영역과 영화제 사무국 운영 영역을 나눠 서로 견제할 수 있게끔 하는 혁신안을 내부에 제시했다고 한다.
 
일부 영화 단체나 영화인들의 성명과 비판은 그런 혁신안을 들여다보거나 청취하지 않은 채 연명판을 돌린 결과물로 보인다. 부산영화제의 한 스태프는 6월 중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작 이사회가 내부 의견이 아니라 외부 여론에 흔들리고 있는 게 안타깝다"며 "조 위원장의 해촉 여부가 핵심이라기보다 영화제를 무사히 잘 치르는 게 우선인데 (의사결정권자들이) 눈치만 보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 스태프의 말이 이번 사태의 또 다른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총회 투표권을 지닌 집행위원과 이사진 31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본인들이 선출한 임원을 스스로 해임했다. 지난 2016년 이후 민간 이사장 체제를 구축하며 부산시 및 정치권의 압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게 된 부산국제영화제가 여전히 외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건 아닐까.
 
"부산 지역 매체들은 사내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하나하나를 다 받아서 쓰고 있고, 내부 스태프들은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왜 사퇴했는지 여전히 분명한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다."
 
6월 26일 임시총회를 지켜본 또다른 부산영화제 내부 스태프의 고백이다. 그는 "조종국 운영위원장의 혁신 계획이 체계적으로 공표하거나 공감을 얻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번 사태가 시작됐다"며 "표결 결과는 찬성 16표, 반대 12표로 해촉안이 가결됐지만 꽤 다양한 이야기가 총회에서 나왔다"고 전했다.
 
아직 회의록이 나오기 전이지만 복수의 내부 관계자 말을 종합하면 이번 안건이 올라가기까지 스태프들과 당사자들의 발언이 빠진 것, 선정위원회 프로그래머가 영화제 운영 전반까지 대행을 하는 것, 그리고 수석프로그래머가 내부 일을 논의도 없이 외부에 공표해버린 것 등에 대한 성토가 있었다고 한다. 조종국 위원장 해촉에 목소리를 높였던 일부 서울지역 영화인들은 왜 (조 위원장을) 해촉해야 하는지 총회에 참석해서도 명확히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부산영화제 스태프는 "왜 이런 상황 때마다 여론에 따라 우리가 정한 걸 바꿔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지 슬프다"며 "예산의 방만한 운영을 막기 위해 운영위원장직을 만든 건데 내부 의견은 잘 듣지 않은 채 외부에 흔들리는 이사회를 보며 참담한 마음이 든다"고 덧붙였다.
 
이는 내부만의 의견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가 "조종국 사퇴가 없으면 영화를 주지 않겠다 입장을 표명한 영화사가 나온 터라 절박한 심정으로 (자진 사퇴를) 말했다"는 취지로 올린 SNS글에 윤성호 감독은 "요약하면 '이 양반한테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어떤 영화사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양반을 꺼리니 불문곡직하고 알아서 관두면 좋겠는데 이분이 그렇게 해주는 센스가 없어서 영화제가 큰 위기니 같이 질타 좀 해주라' 쯤 된다"며 "진짜 그런 정도의 이슈였던 건가. 뭔가 문제가 있으면 (아마 그래서 이러시는 걸테니) 저희 같은 3자들이 갸웃하지 않고 끄덕거릴 수 있도록 공유해주면 좋겠다"고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이무영 감독은 27일 오전 주변 동료 및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보냈다. 그는 "이번 신임 운영위원장 인사가 밀실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하는데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임명될 때 절차는 밀실인사 아니었나"라며 "영화제 특성상 영화 지식과 영화계에 많은 인맥을 갖춘 자라야 일차적으로 수장이 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부산을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제가 적합한 인사를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하고, 추후 공적인 절차로 최종 임명하는 것"이라 짚었다. 
 
이어 이 감독은 "조종국 운영위원장의 임명도 그 절차를 따른 것뿐이다. 추천한 사람이 이용관이든,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다"라며 "(다만) 의견수렴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추천부터 임명까지 과정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문제가 왜 이사회의 중요 이슈로 다뤄지지 않았는지 참 궁금하다"라고 의문을 표했다.
 
또한 이 감독은 "부산영화제 위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언제부터 영화인들이 집단으로 일개 영화제에 감 놓아라 콩 놓아라 하게 됐는지 정말 이상하다"며 "민주사회인 만큼 자유롭게 불만을 표할 수도 허문영에 온정적 자세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불만을 가진 이들이 연대해서 인사 자체를 무력화한다면 그게 폭력이고, 더 나아가 불법"이라 강하게 비판했다.
 
이무영 감독의 지적대로 과거 전주영화제든 부천영화제든 프로그래머 인사나 새로운 집행위원장 선정 과정에서 여러 잡음이 있었지만, 법적 하자나 결격 사유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이번 부산의 경우처럼 영화인들이 집단 반발한 경우는 없었다. 결국 외부 영화인들의 압력은 통한 듯 보였고, 이용관 이사장 또한 사임 의사를 다시 한번 밝힌 상태다. 이런 결과를 과연 한국영화계가 바랐던 것일까. 그간 이용관 이사장은 부산영화제 130여 억원 예산 가운데 약 40% 수준의 금액을 매년 후원받아온 상태라 그의 사퇴로 당장 올해 부산영화제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부산시의회나 블랙리스트 주체였던 일부 정치인들이 이때다 싶어 <다이빙벨>을 선정했던 이용관 사퇴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공과야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받겠지만, 블랙리스트 투쟁의 상징이던 인물을 양쪽이 동시에 때리는 모습은 왠지 혼란스럽다. 지금 한국사회의 단면이 날카롭게 드러난 것 같아 묘한 기시감마저 든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부산 한국영화
댓글1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