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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30일 오후 1시 57분]
 
전시 작품인 밴드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 초상화 앞에 선 라바르 박재완 대표 (맨 오른쪽), 유규 작가 (가운데), 기자 (맨 왼쪽)
 전시 작품인 밴드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 초상화 앞에 선 라바르 박재완 대표 (맨 오른쪽), 유규 작가 (가운데), 기자 (맨 왼쪽)
ⓒ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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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 지난 25일, 제주시에 있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 가까이를 이동해야 만날 수 있는 서귀포의 갤러리에 장대비를 뚫고 방문한 이유는 '그림이 된 나의 뮤즈'들을 알현하기 위해서였다. 내게 음악 활동을 하라며 청소년 시절에 우주적 계시를 내려주었던 거룩한 존재, 거인 뮤지션들에 대한 예우라고나 할까.

세속의 오물을 정화하려는 듯 성수(聖水)처럼 비가 오시는 가운데, 유규 작가의 개인전 <Muse, Sing My Persona : 신은 내 곁에>가 열리고 있는 서귀포 복합문화공간 라바르에 성지 순례자처럼 경건히 들어섰다.

이번 전시는 유규 작가 자신에게 마음을 씻을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던 뮤지션들을 캔버스에 재림시킨 그림들로 채워졌다. 장대한 스케일의 뮤직 페스티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라인업이 화려하다. 너바나, 롤링 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펄잼, 칸예 웨스트, 들국화, 김현식, 유재하 등등.

이 성인들은 나 역시 경애하는 존재이기에, 붓으로 음악의 신들을 불러낸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이날 나는 유규 작가와의 인터뷰를 갤러리에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유규 작가를 직접 만나고 보니 예전에 오며가며 인사하고 지내던 같은 대학 선배였던 것이다.
 
작품을 설명 중인 유규 작가
 작품을 설명 중인 유규 작가
ⓒ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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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당시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던 유규 선배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범상치 않은 길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내게 각인된 장면 하나가 오랜 세월 너머 또렷하다.

어느 날, 우리 학교의 인문관에서 경영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유규 선배는 한 여학생에게 연기 트레이닝을 시키며 걷고 있었다. '계단을 오가는 학생들을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건물들 사이로 난 길을 무대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공연을 하는 것처럼 대사를 내뱉어보라'고 큰 소리로 지도하는 광경에 주변의 학생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지만 선배는 타인의 시선보다는 연극 연습에 몰입했다. 대학 캠퍼스를 이렇게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며 그에게서 예술가의 향기가 난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유규 작가는 여전히 커트 코베인 헤어스타일로 세상의 계단에서 큰 소리로 자신만의 사운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 작가는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밥을 먹듯 숨을 쉬듯, 그리는 일을 본능처럼 해왔다.
 
유규 작가 인터뷰
 유규 작가 인터뷰
ⓒ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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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작곡을 어떻게 할 수 있냐고 묻는 분에게 태어난 곳이 예술의 도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악창의도시인 통영이라 가능한 일이라고 웃으며 말하곤 하는데, 유규 작가의 고향도 통영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음악도시에서 자란 뮤직 키드였던 유규 작가에게 음악은 영혼의 알약이었다. 낡고 시시하고 병든 주류 사회 시스템이 생산해내는 소음들을 덮어버린 경쾌한 자유의 사운드 덕분에 삶은 충만했다. 그래서 지휘봉처럼 붓을 들고 뮤지션들을 드로잉한 것은 예술 본성을 지닌 이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내가 그리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다 보면 그의 음악을 느끼고 그것이 그림으로 옮겨가면서 그가 내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연주하는 그를 직접 보면서 그리는 듯한 황홀감을 느낀다. - <무경계 갤러리 북>(한그루 펴냄)에 담긴 유규 작가의 글에서
 
 
아름다움에 미세먼지가 잔뜩 낀 세계의 질서로부터 탈주한 유규 작가는 스무살 때부터 열망해오던 제주에서의 생활을 2010년부터 유목민처럼 시작하다가 2018년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는 서귀포 산방산 근처 창고천의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맹지의 컨테이너를 작업실 겸 숙소로 쓰고 있다. 하루 4시간의 설거지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비를 마련하여 작품 활동에 매진하면서 말이다.

세계자연유산 제주에 푹 파묻혀 지내고 있는 유 작가에게 제주는 '세계치유유산'이다. 자신이 가장 환희의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림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뮤지션들의 예술혼을 재현해내는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과정은 탈피와 충돌이 무성하겠지만 음악과 그림으로 상처에 새 숨을 일군다.
 
유규 작가는 팔레트 대신 다 쓴 플라스틱 용기를 재활용한다. 전시장 한 켠에 마련된 작가의 방을 소개 중인 모습
 유규 작가는 팔레트 대신 다 쓴 플라스틱 용기를 재활용한다. 전시장 한 켠에 마련된 작가의 방을 소개 중인 모습
ⓒ 라바르(박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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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기획한 라바르 박재완 대표는 유규 작가 개인전을 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유규 작가가 그린 '뮤지션의 초상'을 보며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렸어요. 내가 너바나를 좋아하고 건즈앤로지스를 좋아했던, 나의 찬란했지만 처절했던 20대 시절을 건드렸지요. 거기서 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이런 게 그림의 힘이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죠. 그래서 사람들이 젊은 날의 자신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면서 스스로 치유하기를 기대하며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발가벗은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며 씻어내려는 전시 의도와 너무나 잘 어울리게 라바르는 사실 목욕탕 건물이었다. 1971년부터 영업해온 온천탕을 목욕탕 운영자의 손자인 박재완 대표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유규 작가의 그림들은 흘러내리는 붓터치가 특징인데 목욕탕 거울에 달라붙었던 습기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목욕탕의 영혼이 라바르에 서려있는 것 같아서 작가와 공간의 합이 미학적이다. 유규 작가도 그 합일을 운명적으로 예견했던 것인지, 라바르와의 첫 조우를 이렇게 떠올렸다.

 "<무경계 갤러리 북> 출간 기념 전시회를 마치고 밤산책을 하다가 어둠 속에서 라바르 건물을 처음 보았어요. 건물 입구의 대리석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구요. 처음에는 대리석의 정체를 잘 몰랐어요. 추상화 작품일까? 바닷가 풍경을 그린 걸까? 건물의 느낌이 매력적이어서 가까이 가보니 전시 공간이더군요. 저기서 나의 작품을 꼭 전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먼저 전시를 제안드렸었죠."

인터뷰를 마치고 라바르와 세속을 경계 짓는 대리석 벽으로 된 통로를 걸어서 나왔다. 장맛비가 여전히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얼마간 희열을 느끼다가 또 얼마간 침잠하겠지만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으니 괜찮다.

치유를 주제로 하는 라바르의 전시와 삶을 치유하는 유규 작가의 작품 활동을 앞으로도 주목해본다(유규 작가의 전시<Muse, Sing My Persona : 신은 내 곁에>는 7월2일까지 진행된다).

태그:#유규, #예혁, #라바르,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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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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