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가 개봉했다. 지난 2021년에 촬영을 끝낸 <밀수>는 당초 작년에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많은 영화들의 개봉이 밀리면서 덩달아 개봉이 올해로 미뤄졌다. 하지만 김혜수와 염정아, 조인성, 김종수, 박정민, 고민시 등 화려한 캐스팅을 앞세운 <밀수>는 개봉 4일 만에 전국 125만 관객을 동원하며 순조로운 흥행속도를 보이고 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류승완 감독은 2010년 <부당거래>로 276만, 2015년 <베테랑>으로 1341만, 2017년 <군함도>로 659만, 2021년 <모가디슈>로 361만 관객을 동원한 충무로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다. 뿐만 아니라 2015년 청룡영화상과 2016년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2021년 청룡영화상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 작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 역시 점점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화려한 액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감독이었다. 이 때문에 감독의 높은 이름값에 비해 흥행성적은 기대만큼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2013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통해 촘촘한 이야기와 화려한 액션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흥행 감독으로 거듭났다. '한국형 첩보액션의 명작'으로 꼽히는 하정우, 한석규,류승범, 전지현 주연의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CJ ENM

 
할리우드와 다른 매력의 한국형 첩보영화들

< 007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본> 시리즈로 대표되는 첩보영화는 할리우드나 영국처럼 영화산업이 크게 발달한 나라에서나 가능한 장르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아시아에서 영화산업이 가장 발달한 홍콩에서조차 첩보물은 <폴리스 스토리>나 < 007북경특급 >처럼 코믹요소를 섞어 변형된 형태로 제작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영화의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한국의 정서에 맞는 첩보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형 첩보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역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이 영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평가 받는 강제규 감독의 <쉬리>다. <쉬리>는 첩보물과 액션 블록버스터, 그리고 멜로물의 정서를 적절히 섞은 영화로 개봉과 함께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실제로 <쉬리>는 전국 관객집계가 공식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90년대 후반 서울에서만 244만 관객을 동원하며 <서편제>의 기록(103만)을 2배 이상 가볍게 경신했다.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김지운 감독은 2016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독창적인 첩보영화 <밀정>을 선보였다. 1923년에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베이스로 한 '팩션(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덧붙인 이야기)'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등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밀정>은 전국 75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6년 추석 시즌을 지배했다.

작년 세계적으로 1억3000만 시간이 넘는 누적시청시간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연출했던 윤종빈 감독의 2018년작 <공작>은 첩보물에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액션 장면을 최소화한 영화다. 하지만 <공작>은 박석영(황정민 분)과 리명운(이성민 분)의 치열한 심리대결이 그 어떤 액션보다 관객들을 긴장시켰고 전국 497만 관객을 동원하며 슬럼프에 빠질 뻔한 윤종빈 감독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제목부터 대놓고 첩보영화임을 알 수 있는 <스파이>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서 환상의 호흡을 선보였던 설경구와 문소리가 부부스파이로 출연한 코믹 첩보영화다. 개봉 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연출한 영화 <트루 라이즈>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인지도와 크게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343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스파이>에서는 북한 과학자로 출연한 배우 한예리의 신인시절을 볼 수 있다.

유럽 올로케로 만든 <베를린>의 화려한 액션
 
 <베를린>에서 부부였던 하정우(왼쪽)와 전지현은 2년 후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통해 재회했다.

<베를린>에서 부부였던 하정우(왼쪽)와 전지현은 2년 후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통해 재회했다. ⓒ CJ ENM

 
2000년 독립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한 류승완 감독은 적게는 2~30억, 많게는 60억 정도의 제작비로 2년에 한 편씩 꾸준히 신작을 선보이던 부지런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베를린>은 감독 데뷔 후 처음으로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었다. 한석규와 하정우, 전지현, 류승범으로 이어지는 캐스팅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고 독일과 라트비아를 오가며 유럽 현지 올로케로 촬영했다.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당연히 손익분기점(450만)도 높았는데 류승완 감독은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도록 흥미로운 이야기와 멋진 액션들로 런닝타임을 채웠다. 표종성(하정우 분)과 정진수(한석규 분), 동명수(류승범 분)가 베를린이라는 낯선 땅에서 서로를 속이는 첩보전도 흥미롭고 표종성과 련정희(전지현 분) 부부가 괴한이 습격한 집에서 빠져 나오면서 보여주는 액션들도 상당히 화려하다. 

<추격자>와 <국가대표>,<황해>,<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 등을 연속으로 흥행시킨 하정우는 <베를린>을 통해 '믿고 보는 배우'로 이미지를 굳혔다. 특히 <베를린>의 마무리를 장식한 대사 "블라디보스톡, 원웨이"는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손명오(김건우 분)에 의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하정우는 '먹방'을 잘하는 배우로도 유명했는데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이 300만 관객을 돌파하자 삭제장면인 하정우의 '바게트 먹방'을 공개했다.

2010년 <이층의 악당> 이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출연하면서 약 3년 간 영화 활동이 잠잠했던 한석규는 <베를린>에서 베테랑 국정원 요원 정진수를 연기했다. 사실 <베를린>은 표종성과 련정희,동명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예정이었지만 북측인물만 등장하면 이념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 제작사에서 뒤늦게 정진수 캐릭터를 추가했다. 이 때문에 정진수 캐릭터는 한석규라는 배우의 인지도에 비해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엔딩 장면에서 대놓고 속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베를린>은 개봉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직 속편 제작소식이 구체적으로 들려오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류승완 감독의 최고흥행작 <베테랑>이 정해인을 새로운 빌런으로 캐스팅해 속편 촬영을 모두 마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먼저 개봉했던 <베를린> 속편제작이 미뤄지는 점은 다소 안타까운 일이다. 류승완 감독 역시 현재로서는 <베를린> 속편의 제작계획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 현장분석관이 된 윤종빈 감독 
 
 하정우의 절친한 동료인 윤종빈 감독(오른쪽)은 <베를린>에서 국정원 현장분석관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하정우의 절친한 동료인 윤종빈 감독(오른쪽)은 <베를린>에서 국정원 현장분석관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 CJ ENM

 
류승범이 연기한 동명수는 북한 고위층 인사 동중호(동방우 분)의 아들로 표종성이 아랍테러조직과의 무기거래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추궁하기 위해 평양에서 베를린으로 파견을 왔다. 과거에는 개인적으로 표종성을 '성님', 련정희를 '형수님'이라고 부를 만큼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베를린에서는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결국 마지막 격투에서 표종성과 싸우던 동명수는 목에 독을 주입 당하면서 숨을 거둔다.

2012년에 개봉했던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서 발랄한 줄타기 전문가 예니콜을 연기했던 전지현은 차기작 <베를린>에서 조용한 성격의 표종성 아내 련정희 역을 맡았다.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 촬영 당시 련정희의 외로운 캐릭터를 극대화하기 위해 스태프들에게 전지현을 외롭게 만들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베를린>을 끝낸 전지현은 그 해 연말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발랄한 톱스타 천송이를 연기했다.

<베를린>에는 오늘날 대중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된 배우들이 단역에 가까운 조연으로 등장했다. 최근 종영한 <부산촌놈 in 시드니>에서 남다른 친화력을 보였던 배정남은 대사 한 마디 없는 동명수의 호위요원으로 출연했고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이수로 유명한 박지환은 보위부 요원으로 등장했다. < SKY캐슬 >과 <아무도 모른다>, <종이달> 등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던 김서형도 <베를린>에서는 북한대사관 비서 역으로 짧게 출연했다.

<베를린>에는 하정우의 전작 <범죄와의 전쟁>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이 국정원의 현장분석관 역으로, <미스 홍당무>를 만들었던 이경미 감독이 국정원 사무분석관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특히 윤종빈 감독은 지난 2006년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허지훈 이병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한 바 있어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베를린 류승완 감독 하정우 한석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