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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늦게 눈을 뜬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며 방을 나서니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거실 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어두운 표정으로 게임에 열중해 있는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비 오는 일요일 아침이라니, 참 달갑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로군.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별 대화 없이 밥을 차려먹고 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데 어쩐지 입이 계속 심심했다. 과식을 하지 않고 배고플 때만 적당량의 음식을 먹기로 다짐했건만 스스로와의 약속이 무색하게 냉장고를 열고 체리와 방울토마토를 꺼내고야 말았다.

부지런히 과일을 집어 올리는 남편과 내 손으로 인해 접시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책을 몇 장 읽지도 못한 채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냉동실을 뒤져 꽝꽝 얼어붙은 꿀떡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몇 분 후 뜨끈뜨끈해진 떡을 접시에 담아 들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빠른 속도로 비워지는 접시를 보니 마치 좀 전의 상황을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한 것 같다. 음식은 계속 입으로 들어가는데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마음 저 밑바닥에는 언제라도 불씨만 던져지면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짜증이 도사리고 있다.

눈은 게임 화면에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 남편에게 흘낏 시선을 던졌다. 부지런한 그가 평소와 달리 이렇게 게임에 빠져있는 이유는 내일 출근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서일 것이다. 그런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몇 시간째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단조로운 게임 사운드의 반복에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결국 한 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책 읽고 있는데 소리 좀 줄이면 안 돼?"

대답이 없길래 못 들었나 했는데 남편이 느릿느릿 헤드셋을 꺼내 게임기에 연결했다. 소리는 사라졌지만 큰 TV 화면 가득 펼쳐지는 지구 종말 이후의 황폐한 풍경 때문에 여전히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게임 좀 그만하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오늘처럼 서로 예민한 날은 잘못하면 말다툼으로 번질 수 있어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삼켜버렸다. 제대로 씻지 않아 꾀죄죄한 몰골로 앉아있는 남편을 쳐다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창부수일 필요는 없는데...

사실 일어나자마자 씻었어야 했는데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게으름을 부리다 보니 반나절을 그냥 허비하고 말았다. '씻어야 한다' VS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두 생각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내가 선택한 건 일단 의자에서 일어나기였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서 욕실로 가는 거야. 딱 거기까지만 해보자.' 스스로를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 문을 닫고 거울 속의 모습을 응시했다. 여전히 씻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우선 양치만이라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안에 밀어 넣고 구석구석 닦았다. 칫솔질을 마치고 입안을 물로 헹궈내니 한결 개운했다.

'내친김에 머리만이라도 감아볼까. 자, 셋을 세고 머리에 물을 끼얹는 거야. 하나, 둘, 셋!' 이번에는 샤워기를 들어 머리에 물을 뿌렸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상쾌했다. 머리를 적시고 나니 샤워를 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가벼운 화장을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그다음의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보, 나가자!"
 
비온 뒤 더 싱그러워진 초목들
 비온 뒤 더 싱그러워진 초목들
ⓒ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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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병, 아니 일요병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남편을 끌어당겨 씻게 한 후 현관문을 나섰다. 나가는 김에 문 옆에 잔뜩 쌓여있던 재활용 쓰레기도 집어 들었다. 어질러져 있던 일상이 하나씩 정돈되어 간다. 일요일 오후라는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 기분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졌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알려진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그의 저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외부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라지 말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라고, 그러면 적어도 지금 무기력하게 서 있는 그곳은 탈출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책을 통해 습득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무기력과 우울감이 찾아올 때는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한다. 부담스럽지 않게,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한결 나아진 상황에 놓여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비 온 뒤의 상쾌한 공기가 두 뺨을 훑고 지나간다.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운 초록을 뽐내는 가로수를 눈에 담으며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남편도 아까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다.

산책을 하고 카페에 들를까, 아니면 영화라도 볼까. 아직은 일요일이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 씻지 않았으면 소중한 휴일을 괴로워하며 흘려보낼 뻔했다. 어차피 다가올 월요일인데 미리 앞당겨서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꿀 수 없는 상황으로 고민하며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현재를 사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내 앞의 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이다.
 
모든 것은 작은 변화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은 작은 변화에서 시작한다.
ⓒ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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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월요병, #무기력,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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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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