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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카눈이 몰아치던 날, 학교 정문에서 수험생에게 고사실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태풍 카눈이 몰아치던 날, 학교 정문에서 수험생에게 고사실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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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마음으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크록스를 신고 모내기하는 우리 조상님들 마냥 바지를 걷어붙이고, 노란 우비를 입고 빨간 우산까지 썼다. 허나 몰아치는 비바람에 바지는 다 젖어버리고, 손에 쥐고 있던 수험생 명단은 이미 비바람에 젖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며칠 전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한 날, 우리 학교에서는 2023년도 제2회 검정고시가 치러졌다.

교사가 수업이나 생활지도 외에 수많은 행정 업무가 있다는 사실은 이제 교육 가족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이나, 올해는 나도 경험하지 못한 '검정고시' 업무를 맡게 됐다(물론, '검정고시'는 내가 맡게 된 여러 가지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

검정고시 시험을 감독할 교사를 자원 받아 교육청으로 공문을 보내면 된다는 간단한 업무로 인수인계받았는데, 학기가 시작되고 나니 올해부터 2년간 우리 학교가 검정고시 시험장으로 지정이 됐단다. 어딜 가도 일복이 많은 나지만 육아휴직 후 3년 만의 복직이라 동공이 흔들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준비부터 당일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네 

기일이 다가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시험 당일 관리 위원과 전날 시험장 준비를 위한 사전 설치 위원을 우리 학교 교직원에게 자원 받아 교육청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험 전날 교육청 직원을 도와 시험장 준비를 하고, 당일 관리 위원(시험 감독 위원, 복도 감독 위원, 주차 및 교문 출입 관리 위원)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내 몫이다. 미리 예약했던 떡을 찾고, 36만6000원의 예산으로 90여 명이 먹을 다과를 최대한 많이 살 수 있도록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카트를 채웠다.

검정고시 관련 주 업무는 교육청에서 대부분 담당하지만, 나뿐 아니라 우리 학교의 모든 구성원도 조금씩 거든다. 시험 전날 담임교사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책상 배치를 시험 대형으로 바꾸고 교실 환경 정리를 한다. 사전 설치 위원으로 자원한 교직원은 교육청 직원을 도와 책상에 수험생 이름과 번호가 적힌 라벨을 붙이거나 학급 팻말을 고사실 표시로 바꾸는 등 시험장 준비를 돕는다.

고사 당일 관리 위원으로 자원한 교직원은 복도 감독 위원이 되거나 주차 안내 및 교문 출입을 통제한다. 교사가 아니라 교직원으로 칭한 이유는 이 거사에 교사뿐 아니라, 보안관, 행정실 주무관, 교무 행정사 등 모든 구성원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시험 당일, 하필이면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일찌감치 출근한 우리는 고사가 잘 진행될지 걱정이 태산이다. 전날부터 멀쩡했던 에어컨이 교실 세 곳에서 고장 나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기에, 당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하루종일 고생하시는 위원들의 떨어진 당을 보충하기 위해 준비한 간식들.
 하루종일 고생하시는 위원들의 떨어진 당을 보충하기 위해 준비한 간식들.
ⓒ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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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비바람을 맞으며 주차 안내를 하고 있는 교직원을 창문으로 틈틈이 주시하며 전날 준비했던 다과를 전기포트와 함께 감독관 대기실에 비치했다. 고생하고 돌아올 선생님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도 내렸다. 1교시 시작 즈음 주차 안내를 마치고 돌아온 교직원과 따뜻한 커피에 떡과 주전부리로 배를 채운 후 바로 교문 정문과 후문 출입을 관리할 근무 조를 편성했다.

이미 주차 안내로 지친 교직원을 위해 1번 타자로 정문으로 향했다. 바람까지 부니, 우비도 소용이 없다. 우비에 달린 모자를 쓰고 또 써 봐도 다시 벗겨지고, 바지는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다 젖었다. 심지어 고장 난 우산도 아닌데, 빗물이 스며드는지 부스스해진 머리칼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와중에도 교문을 지키며 만나는 여러 수험생에 대해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수험생을 보면 저들은 무슨 뜻으로 공교육을 뒤로하고 검정고시를 치르는지 그들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시험을 망쳤다고 '다음에 또 올게요' 하는 할머니 수험생을 보며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우주의 누군가에게 할머니의 합격을 간절히 기원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보니 한 시간이 금세 흘러 다음 근무조인 박 선생님이 왔다.

학교로 돌아온 후, 남은 다과를 챙겨 감독관 대기실의 간식 바구니에 다시 가득 채워 넣었다. 평소엔 비가 와도 멀쩡했던 학교가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곳곳에 빗물이 새서 신문지를 깔고 임시방편으로 쓰레기통을 가져다 받쳤다.

행정실장님도 멍석말이를 어깨에 지고 수험생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가 많이 샌 곳에 가져다 까느라 바쁘고, 복도 감독인 서 선생님도 누가 바깥 창문을 열어놨는지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온 빗물을 닦느라 정신없다. 오늘 근무가 아닌 시설 주무관님도 호출되어 학교를 돌보고, 평소 일을 찾아서 하시는 책임감 강한 교감선생님과 교무부장님도 동분서주했다.

점심시간은 교육청에서 배달시킨 도시락을 먹었다. 그 시간에도 학교 건물 출입문을 통제해야 하는 교사는 서둘러 먹고 나가야 했고,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가 걱정된 나와 교무부장님도 서둘러 빈 도시락을 수거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보통은 음식물이 남아도 도시락에 넣은 채로 박스에 넣어 업체로 보낼 텐데, 환경을 걱정하는 교감 선생님이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배출해야 한다고 1회 고사 때 강력히 주장하셨더랬다. 당시엔 교육청에서도 그 부분은 준비하지 못했던 터라, 학교의 잔반 통을 이용해 음식물 분리수거를 했었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잔반 통에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모습.
 임시방편으로 만든 잔반 통에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모습.
ⓒ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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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교육청에 건의하여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구입하여 거기에 담아 버리기로 했다. 이번 고사 때는 교육청에서 이미 그 일의 담당자까지 배정을 하였는지 곧 다른 직원이 음식물 분리 수거를 하여,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오후 시험이 시작되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흘러 15:50.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감독관 대기실에 비치한 전기포트와 간식 바구니를 수거하고, 교감 선생님과 코로나 확진자 고사실로 사용된 강당을 정리했다. 태풍이 몰아치고, 거듭되는 방송과 우리의 제지에도 교내에서 태연히 흡연을 하는 거친 수험생 때문에 마음을 졸였지만 이번 검정고시도 무사히 끝났다. 만세다.

고생한 우리 선생님, 교육청 관계자, 열심히 공부했을 수험생 모두에게 박수를. 그나저나 곧 수능감독관도 자원받아야할텐데 많은 선생님들이 협조해 주시겠지? 인원이 다 안 차면 제비뽑기를 해야 하나 벌써 고민이 되네. 

덧붙이는 글 | 회사에 근무하다 뒤늦게 교사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차세대 나이스로 난리가 났을 때도 어찌 저찌해서 업무를 처리했고, 어느 자리에서든 아이들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이런 교사가 현장을 더는 떠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오길 바랍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검정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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