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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용산치 건너편 임시 안치소 컨테이너 모습
 용산치 건너편 임시 안치소 컨테이너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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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용산치) 417-2 유해 임시안치소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용산치) 417-2 유해 임시안치소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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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차 발굴을 마친 후 1차 때 잠깐 언급한 '컨테이너 박스 유해가 왜 명석고개에 있는 것인지'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관련 기사: 언 땅, 질퍽한 흙... 그 사이에서 뼈와 유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https://omn.kr/25j4w)

이상길 경남대 교수 논문자료를 찾아 보고 진주유족회의 입장도 좀 더 상세히 알아봤다. 경남대 박물관장 조호연 교수를 통해 당시 입장을 확인한 결과, 2014년 2월 19일에 대학 내 10년간 보관 중이던 여양리 유해 163구를 용산고개 컨테이너로 옮긴 것을 확인했다. 

우선 이상길 교수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 2004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여양리와 인연을 맺은 이 교수는 같은 해 창원 여양리, 2007년 경산 코발트, 2008년 산청 외공리·원리, 2009년 진주 문산 진성고개 등 유해를 발굴하였다. 8년 여간 유해 발굴에 혼신을 쏟아부었던 그는 2012년 한국전쟁 전후 진주지역 민간인 집단학살 유해 매장지 탐색조사와 유해 매장지 현황조사 중 생을 마쳤다.

지금부터 그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여양리 발굴장 왜 중요한가

백골은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로 확인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민간인 180여 명, 군인 40여 명이 쓰리쿼터 1대(지휘차량)와 트럭 4대를 타고 여양리 골짜기로 진입했다. 트럭 1대에는 가해자가 10명 내외 탑승했으며, 이것을 기준으로 골짜기에 끌려온 인원은 180~2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양리 학살지는 진주형무소에서부터 약 54km 정도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라 2~3시간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렇게 먼 그곳을 왜 학살지로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이는 차후 연구 대상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정권(제2공화국 정권)이 들어서자 숨죽이고 살아가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유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장면 정권은 유족들의 매장지 확인, 발굴 사업을 모두 인정하였다.

하지만 발굴사업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발굴 사업을 추진했던 유족들을 모두 구속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군인과 경찰은 발굴 유해 합동 묘지를 파헤치고 화형으로 부관참시한다. 이 결과,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50여 년을 숨죽여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여양리 매장지 3개소(숯가마, 폐광, 너덜겅)를 흔들어 놓았다.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지는 장대비와 거칠게 몰아치는 태풍에 땅에 묻혀 있던 숯가마 속 백골들이 인근 고추밭으로 내려와 '나 여기 이렇게 죽었노라'라고 모습을 드러냈다. 민간인학살 매장지가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좌측 위부터 너덜겅, 폐광, 숯막 발굴지와 필자가 관리하는 모습.
 좌측 위부터 너덜겅, 폐광, 숯막 발굴지와 필자가 관리하는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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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리 발굴사업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맡기로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2004년 4월 26일 여양리 민간인 학살유해가 인부들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걸 언론을 통해 알게 된다. 유해를 수습하는 데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대책위원회와 접촉 후 현장을 방문한다.

그러나 당시 여양리 숯가마 수습 작업은 인부들에 의해 완료된 상태였다. 현장을 돌아본 이 교수는 무질서한 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인부들을 철수시킨 후 현장 일체와 수습한 유골 전부를 경남대 박물관으로 인수한다. 그리고 향후 수습 작업에 드는 비용 일체는 발굴팀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발굴작업 때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진주 유해발굴 행사에 꼭 참석하는 유족 정영우씨의 "여양리 발굴 때 내가 사흘이 멀다하고 다녔어"라는 발언이 떠올랐다.

"어르신, 사진 있습니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가 다 찍었어."
"어르신 제가 찾아뵐게요. 제가 여양리 사진 자료가 필요합니다."


2023년 8월 23일, 정 어르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 자료가 제법 있었다.
 
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사업을 맡기 전 숯가마에서 밀려 내려온 유해와 유품을 묻기 위한 모습
 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사업을 맡기 전 숯가마에서 밀려 내려온 유해와 유품을 묻기 위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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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사업을 맡기 전 숯가마에서 밀려 내려온 유해와 유품을 묻기 위한 모습
 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사업을 맡기 전 숯가마에서 밀려 내려온 유해와 유품을 묻기 위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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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왜 여양리 발굴 때 자주 다니고 사진을 찍었습니까?"
"진주형무소에서 호명한 후 사람들을 트럭에 태웠는데 여양리 가는 트럭에 아버지가 탔다는 걸 들었어."


정씨는 여양리가 아버지 학살된 곳이기에 열심히 다녔고 사진을 보관해 뒀다고 했다. 정영우 유족의 사연은 차후 기사화할 것이다.  

유전자 검사 통한 유족 찾기는 여전히 희망 사항

2004년 6월 30일, 발굴사업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이 교수는 보고서에 앞으로 처리되어야 할 유전자 검사 통한 유족 찾기 등 6가지 사항과 기대를 기록했다.
 
이상길 교수가 보고서에 남긴 6가지 앞으로 처리되어야 할 사항과 기대
 이상길 교수가 보고서에 남긴 6가지 앞으로 처리되어야 할 사항과 기대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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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때아닌 갈등에 부딪히고 만다. 당시 마산시는 발굴사업과 차후 추모시설, 교육 현장 건립을 염두에 두고 발굴지 주변 산지 8천 평을 매입하였다. 시는 발굴을 마치자 여양리에 합동묘 조성을 요청하였다.

이 교수와 진주유족회는 회의를 통해 '여양리 유해 163구에 대한 화장과 합동묘 조성을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족에게 유해를 돌려주어야 해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유전자 검사는커녕 민간인 발굴로 인해 유해와 유품이 공개되고, 가해자 신원이 밝혀지다 보니 언론이나 정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이 교수는 유해를 관리, 보관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합동 묘지 조성을 반대하고 난 후 여양리 유해는 갈 곳을 잃었고, 진주유족회 입장은 유해를 보관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백방으로 고심한 결과 경남대 교정 내를 선택한다.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생들이 자주 다니지 않은 숲속에 유해 컨테이너를 보관한 그는 경남대 박물관 연구원을 찾아 매일 유해의 습도와 온도를 측정하며 소중하게 관리할 것을 지시하였고, 2012년 그가 생을 마치기 전까지 유해는 10여 년간 잘 보존되었다.

필자가 전국으로 유해발굴 봉사를 10여 년간 다녔지만 차후에라도 유전자를 검사하여 유족의 품으로 찾아드려야 한다는 보고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희망과 달리 19년이 지난 지금, 발굴 비용 예산조차 편성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전자 검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진화위도 유족의 유전자 검사 요구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백골의 귀향
 
진주이송안치식 경남도청 앞
 진주이송안치식 경남도청 앞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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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이송안치식 명석고개
 진주이송안치식 명석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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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경남대 측에서 진주유족회에 컨테이너 유해 이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2014년 2월 19일 여양리 유해는 이 교수의 품에서 진주유족회 품으로 귀향했다. 진주유족회의 인사 말씀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죽어서도 서러운 떠도는 넋
편히 누워 잠들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채
차디찬 컨테이저 박스 플라스틱 상자 속에
기억과 함께 하얗게 바래져 가는 백골들의 서글픈 귀향을

여양리 산태골 노출 유해를 수습하고
발굴과 안치를 위해 모든 노력과 헌신으로 아껴주신
고 이상길 교수님의 영전에
산태골의 유해들이 고향 진주로 모셔감을 삼가 고합니다.

2014년 2월 19일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일동
 
이 교수가 유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관리, 보존한 덕분에 현재 용산고개 컨테이너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해와 유품은 역사적 실증적 자료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실체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여양리 유해가 명석고개로 옮겨진 후 2차~10차 발굴된 유해 즉, 산태골 3개소, 진성고개 2개소, 명석고개 2개소, 관지리 2개소, 집현면 봉강리, 관지리 삭평 등이 발굴되었다. 이중 진성고개는 진화위 예산으로 발굴사업 한 결과, 111구를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하였다. 9차 발굴한 유해수 329구와 유품 1080여 점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유해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진주가 유일하다. 용산고개 답사를 방문한 분들 중 대다수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실증적 증거를 만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다만 안전한 여건 속에서 보존되지 못한 상태를 관람하고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아프다.

에어컨 2대에 의지하는 유해는 21년의 세월 동안 많이 훼손되었다. 법적 절차 없이 참혹하게 학살된 것도 억울한데 영혼들의 안식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진실을 밝히는 데 유해를 활용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필자는 유해를 관리, 보관하여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이 교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산태골, 집현면, 진성고개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개체수가 잘 맞게 노출돼 유전자 검사가 용이하다. 이를 통해 그가 간절히 바라고 호소했던 유족 찾기가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필자도 그의 염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픈 역사, 잘못된 역사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 봐야 할 때다.

이상길 교수가 남긴 마지막 글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 이상길 경남대 교수
 고 이상길 경남대 교수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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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넘게 지나 지금 드러난 하얀
백골을 보면 저 뼈에 좌우 이념이 있을까 싶다.
저 뼈를 가지고 오늘날 또다시
좌우를 논해야 되는지 자문해 본다.

지금까지 수백구의 유골을 발굴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죽어서 잊힌 인간일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진주민간인희생자,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이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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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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