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6 07:15최종 업데이트 23.10.06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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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책, 인물, 역사 등 국내외 다양한 사건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합니다. [편집자말]

정지아 작가가 쓴 < 아버지의 해방일지 > ⓒ 창비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지금은 잊힌 말이지만 '빨치산'은 비정규 군사조직을 가리킨다. 러시아말 '파르티잔(partizan)'을 들리는 대로 따라 하다 보니 빨치산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40-50년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총 한 자루를 들고 지리산을 누볐다. 그러니 빨치산이 맞다.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되었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알려진 대로 이 소설을 쓴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말로 빨치산이었다. 아버지는 남로당 전남도당 인민위원장이었고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위원이었다. '지아'란 이름도 둘의 꿈이 묻힌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하니 그는 '빨치산의 딸'이 틀림없다.

'빨치산의 딸'을 거부했던 30여 년 세월
   
작가는 30여 년 전,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낸 일이 있다. 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출판사 사장과 아버지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실천문학>이란 계간지에 빨치산 이야기를 연재했다. 날마다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새벽까지 원고지 100매씩을 써내는 고된 작업이었다. 그리고 1990년에 1년 동안 연재한 글을 엮어 세 권의 책으로 냈다. 제목은 처음부터 <빨치산의 딸>로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 됐을까.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책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안 돼 출판사 사장은 잡혀가고 책은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혔다. 스물다섯 살이던 작가도 3년이나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래도 그사이 책은 10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하니 빨치산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려던 뜻은 이룬 셈이다. 15년이 지난 2005년에야 <빨치산의 딸>은 복간돼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2022년 11월 7일 서울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파랑새극장에서 '문학주간' 개막토크를 이끈 정지아 작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택한 일이었다"고 했다. 적어도 그가 가까이서 지켜보고 겪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들 살려고 상황에 휩쓸렸을 뿐 이념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목숨과도 맞바꿀 신념이 있었다면 그저 "사람의 도리를 하겠다는 거", 그거 하나였다.

또 다른 인터뷰에선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던 날, 그러니까 유럽 사회주의의 보루이던 동독 정권이 무너지던 날, 아버지가 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 시절에는 그 대안이 사회주의였을 뿐이다." -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

30여 년 만에 세상이 받아들인 이야기, 그러나...

<빨치산의 딸>을 낸 지 32년이 지나 작가는 다시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내놨다. 바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빨치산의 딸>이 "한 치의 허구도 없는" 실록이었다면 이번엔 말 그대로 소설, 지어낸 이야기다.

그는 아직 빨치산을 빨갱이라 욕하는 이들이 읽어도 거부감이 없게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라는 특수성보다 '아버지'라는 보편성이 더 중요한 소설"이다. 제목도 온 국민이 다 아는 드라마에서 따왔다. 그가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짜봤다는 '전략'이 먹혔는지 이번 책은 출간한 지 1년도 안 돼 30만 부 넘게 팔려나갔다.

작가는 이 책이 이토록 큰 인기를 끄는 이유를 우리 정치 현실에서 찾기도 했는데,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거"라고 했다. "좌우 어느 쪽이든 사람이 잘 살자고 만들어진 건데 싸움밖에 모르는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모두 식상해진다는 것."

그의 말처럼 한국 정치는 아직도 낡은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또 한 명의 빨치산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시작했다.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던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이다. 정부는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며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있는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가 빨갱이로 낙인찍은 또 다른 빨치산, 홍범도
 

지난 8월 28일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이날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연합뉴스


빨치산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꾸릴 때까지 일본군과 맞섰던 독립군 부대는 당연하게도 빨치산일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이 빨갱이와 첫 글자가 같아 좌익 사회주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 국방부 대변인이 기자들 앞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두고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라고 문제 삼은 것도 바로 그런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홍범도 장군이 훗날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즈음 그가 이끌던 독립군 부대는 군사력을 잃어 더는 무장투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 땅에서 살아가려면 소련 공민증(국적)을 얻거나 공산당에 가입해 식량과 토지, 또 연금을 받아야 했다.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1927년이면 그의 나이도 벌써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그 뒤로 극장에서 수위로 일하며 살아갔다.

홍범도 장군을 연구한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1930년대 말이 되면 소련은 일본·독일과 맞서는 서방과 연합전선을 형성했다"면서 "그런 나라의 공산당원이었다는 게 무슨 잘못이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빨치산의 딸>이 세상에 나온 지 어느덧 30년도 더 흘렀다. 그 사이 세상은 변했고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며 온 마음으로 웃고 울 수 있게 되었다. 더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세상을 좌우로 갈라보지 않게 되었단 뜻이다.

일주일 전인 9월 29일 여론조사에선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6명(63.7%)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의한다'는 의견은 겨우 26.1%였다(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9월 25-27일, 전국 만18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자식들 먹이려 쌀 한 되 잘못 받았다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어야 했던, 그 야만의 시절을 겪어보진 못했어도 그 사정만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국민은 성숙했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던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소설 속 빨치산 아버지를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이유다.

그래서 더더욱 시대 변화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따라가진 못할망정 거꾸로 거스르며 괜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부추기려는 정부의 행태가 몹시도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 번이었다.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
덧붙이는 글 [참고한 글]
"이토록 발랄한 빨치산 시트콤을 보았나", <이코노미조선>(492호), 2023.05.15.
"빨치산 아버지는 사람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 좋은 사람이셨다", <부산일보>, 2022.10.18.
"[인터뷰] 화제작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그 딸 정지아", <여성조선>, 2022.12.17.
"홍범도를 위한 변명", <한겨레21>(1481호), 2023.09.19.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은이), 창비(2022)


[세트] 빨치산의 딸 1~2 세트 - 전2권

정지아 (지은이), 필맥(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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