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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우이도에 있는 진리 선창은 우리나라 옛 선창 가운데 가장 오래된 포구 시설이다. 1745년(영조 21년)에 세운 중건비(重建碑)가 남아 있어 18세기 이전에 만든 시설임을 알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양문화유산조사보고서 05(우이도)에서 진리 선창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해운 관련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중수(重修) 연대가 정확하게 남아 있고 지금까지도 섬 주민들이 활용하고 있는 선창이라서 더욱 의미가 있다.

선창은 배가 닿는 포구 시설과 방파제, 그리고 조선소, 세 가지 기능을 했다. '우이 선창'의 위치는 현재 여객선이 닿는 진리 선착장에서 마을 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형태는 산 경사면의 반대 방향으로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고, 입구는 마을 쪽으로 나 있다. 선착장 아랫부분에는 바윗돌을 깔아 바닷물이 통하도록 했다. 윗부분은 계주석(繫柱石·벼리목)을 설치해 양쪽에서 뱃줄을 매는 돌을 배치했다. 태풍 때면 마을 배들이 모두 '우이 선창' 안으로 피항을 했고 외지 배도 들어오게 했다.
 
조선 영조 때 문순득의 증조부가 화주(化主)가 돼서 중수한 진리선창.
 조선 영조 때 문순득의 증조부가 화주(化主)가 돼서 중수한 진리선창.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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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사업에는 문일장(文日章) 최두산(崔斗山) 등 4명이 화주(化主)를 했고 주민 21명이 시주했다. 석공과 대장쟁이 야공(冶工)까지 이름이 모두 중건비에 남아 있다. 중건비는 비문이 마모돼 육안으로 판독이 어려웠으나 문채옥(文彩玉) 씨가 필사해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 새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 最古의 해양문화유산 진리 선창

문일장은 우이도 문 씨들의 선조. 해남에서 우이도로 이주해 올 때 돛이 세 개인 풍선(風船) 두 척을 갖고 들어왔다고 한다. 문 씨는 어업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상선 기지를 두려고 우이도로 이주했다고 후손인 진리 1구 이장 문종옥(文宗玉) 씨가 말했다. 문일장은 세곡선(稅穀船)도 운용했다.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표류기를 남긴 문순득은 문일장의 4대손이고 문채옥은 문순득의 5대손이다.
 
미사포를 쓴 열녀비의 모습은 우이도에서만 볼 수 있다.
 미사포를 쓴 열녀비의 모습은 우이도에서만 볼 수 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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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는 작은 섬이지만 산림이 울창하여 좋은 선재목(船材木)이 많이 났다. 선창 안에 인근 야산에서 베어온 굵은 소나무를 쌓아놓고 배를 건조했다.

선창에서 마을로 가는 길에 조기간장이 있다. 우이도 사람들은 밑 구덩이를 3m가량 파낸 저장고에 염장(鹽藏) 조기를 저장했다가 추석 대목 때 목포 영산포 등지에 내다 팔았다. 조기간장은 최근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을 마쳤다.

바로 옆에 마리아를 닮은 열녀비가 있다. 1968년에 세운 상원(祥原) 김씨 열녀각. 열녀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흑산도 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 죽자 평생 정절을 지키며 혼자 살았다. 열녀는 유교문화의 유산인데 미사포를 두른 마리아 열녀상을 세운 것이 독특하다. 흑산도 일대에 천주교인들이 많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김씨 집안에서 1988년 선창 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고풍한 밀양박씨정녀비(密陽朴氏貞女碑)를 새로 세웠다. 상원 김씨는 시집 이고, 밀양 박씨는 친정이다.
 
진리 마을의 어부 돌담길.
 진리 마을의 어부 돌담길.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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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마을은 돌담길이 아름답다.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조형미가 있다. 어부돌담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마을에는 '들이샘'이란 큰 우물이 있다. 외지 배가 들어오면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배에 갖다 주고 새우나 잡어 등을 물값으로 받았다. 우이도는 먼바다로 나가거나 연안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바람을 기다리며 물, 화목을 공급받고 배를 수리하는 중간 기항지 역할을 했다.
 
정약전 동상.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흑산도와 함께 우이도에서 연구한 내용도 담고 있다.
 정약전 동상.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흑산도와 함께 우이도에서 연구한 내용도 담고 있다.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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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 생가에는 <유암총서>, <운곡잡저>등 귀중한 서적과 유물이 벽장 속에 보관돼 있었다. 사라질 뻔했던 손암의 저서와 문순득이 중국에서 가져온 유품 등이 후손들의 정성으로 살아 남았다.

문순득 생가, 우이선창, 정약전 유배지, 표해시말, 진리성재 등 우이도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우이도에는 옛날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돈목항에서 100여m 떨어진 구릉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우이도 진리(鎭里)는 명종 11년(1556년)에 수군진이 설치된 이후 생긴 이름이다. 그 후 많은 유배인들이 우이도로 들어왔다. 정약전 최익현 김약행 박우현 등이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정약전이 귀양살이하던 집터에 참깨와 들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정약전이 귀양살이하던 집터에 참깨와 들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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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은 15년 유배생활 중 1801~1805년은 우이도에서 살다 흑산도로 건너갔고 1814년 다시 우이도로 돌아와 1816년 생을 마쳤다. 진리에서 돈목리로 넘어가는 산길 초입에 손암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서당터가 있다. 지금은 서당골이라 불린다. 우대미 집터에는 '손암 정약전 유배 적거지(謫居地)'라는 푯말이 서 있다.

가족과 다산 생각나면 굴봉 올랐다

우이도에는 두 차례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손암의 이야기가 두 세기를 넘어 내려오고 있다. 문채옥 씨는 손암이 귀양살이하던 집터를 사들여 보존했다. 그는 이 터에 정약전의 기념관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굴봉에서 내려다본 띠밭너머 해변. 썰물 때면 풍성사구까지 연결된다.
정약전은 띠밭너머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굴봉에서 내려다본 띠밭너머 해변. 썰물 때면 풍성사구까지 연결된다. 정약전은 띠밭너머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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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거지 바로 앞에 굴봉(窟峯)이 있다. 굴이 많아서 굴봉이다. 손암은 가족과 다산이 보고 싶으면 굴봉에 올라가 띠밭너머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드렸다. 손암이 살기 위해 배교(背敎)하고 목숨을 건져 유배 왔지만 그때까지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처벌이 두려워 잠복했던 신앙이 생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되살아났을 수도 있다.

진리1구 이장 문종옥은 "손암이 굴봉에서 기도드린 이야기는 아버지한테서 들었다"며 "동네에서도 이 이야기가 여러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라고 말했다. 손암이 쓴 <표해시말>이나 <송정사의>가 문채옥 씨 집 다락에 보관돼 있다 발굴됐다. 손암과 인연이 깊은 문씨 후손들의 이야기인지라 믿음이 더 간다.

천주교에서는 흑산도 우이도에서 정약전이 남긴 신앙의 흔적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나 성가집을 찾고 있지만 천주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유배 온 손암이 그런 신앙 고백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굴봉에서 마재의 가족과 강진에 있는 동생을 재회할 날을 기다리며 기도를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다. 가톨릭으로서는 반가운 뉴스가 될 것이다.

손암이 동생 다산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우이도 주민들은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사후 3년이 지난 뒤 약전의 시신은 육지로 운구되었다. 현재는 광주 천진암 성지에 묘소가 있다.
 
선박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무속신앙의 유물인 우이도 진리 성재.
 선박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무속신앙의 유물인 우이도 진리 성재.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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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에서는 띠밭너머 해변으로 가는 고개를 성재라고 한다. 우실 너머 해안가의 절경과 먼바다 위로 떨어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 한여름에도 더위를 식힐 수 있다.

진리 성재는 방석 같은 바윗돌로 만든 돌담 우실이다. 우실은 보통 외풍을 막고 왜구 등 외적으로부터 마을을 가리기 위해 만든 숲을 말한다. 돌로 만든 진리 우실은 무속신앙의 유물이다. 문종옥 이장은 바다에서 불어와 고개를 넘어 당집으로 불어오는 살(煞)바람을 막아준다고 선대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민속(民俗)에서 살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이다. 약 250년 전 입도조(入島祖)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당집 뒤에도 주봉인 비녀봉과 연결된 돌담이 쌓여 있는데 이 돌담이 성재와 마주보고 있다.

'성재'라는 이름은 돌담이 성벽 형태여서 생긴 이름 같다. 신안의 우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하고 아름답다. 돌담이 허물어지고 많이 흩어져 지금은 30m 정도만 남아 있다. 두 개의 돌담이 교차하는 형태. 바깥 담의 길이는 14m, 안담은 26m, 높이는 1.7m. 풍성사구 뒤쪽으로 물이 빠지면 성촌 해변을 통해 이곳까지 걸어올 수 있다. 이곳을 통해 진리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성재 담을 통과해야 액막이를 한다.

진리에서 가파른 고개를 두 개 넘어가면 돼지머리처럼 생겼다는 돈목리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장 큰 사구(沙丘)가 있는 곳이다. 파도에 밀려 모래가 해변에 쌓이고 다시 바람(계절풍)에 날려 만들어진 언덕이다.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끝 산자락에 자리한 사구는 수직고도 50m, 경사면 길이 100m, 경사도 32~33도. 까마득한 600만 년 전에 형성됐다.

600만 년 전에 형성된 풍성사구
 

풍성사구와 해수욕장에는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몰려온다. 여름철에는 예약을 안 하면 돈목리에서 방을 구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인 풍성사구. 왼쪽으로 돈목 해변을 
따라가면 멀리 돈목 마을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인 풍성사구. 왼쪽으로 돈목 해변을 따라가면 멀리 돈목 마을이 보인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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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목리에서 진리로 오자면 험한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한다. 젊은이 걸음걸이로 두 시간 걸린다. 필자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초를 거쳐 오다가 진리에 짐을 내려놓고 그 배를 타고 다시 돈목리로 와서 풍성사구를 둘러본 뒤 산을 넘어 진리 민박집으로 왔다.

가파른 산길에서 무더위에 숨이 턱탁 막혀 죽을 고생이었다. 한화갑 전 의원이 돈목에서 진리로 학교를 다닌 길이라고 했다. 지금도 차가 다니지 않아 돈목과 우이를 오갈 때 주민들은 험한 산길을 피해 배를 주로 이용한다.

오는 길에 진리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길에는 '우이가인'(牛耳佳人)이라는 작은 비석이 놓인 돌무더기가 있다. 마중 나온 문종옥 이장은 오며 가며 그 앞에서 합장을 한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은 아이들의 합장묘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보고서에는 박영월 할머니(2009년 당시 88세)가 "자식 열을 낳았는디 5남매는 땅에 묻고 3남2녀를 키웠다"고 말하는 개인 생애사 인터뷰가 들어 있다.

우이도에는 아름답고 흐뭇한 미담도 많지만 짠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술총서 제16집 전통한선과 어로민속조사보고서 5 우이도, 2009
이덕일, 《정약전과 그의 형제들》, 다산초당, 2021
이태원, 《현산어보를 찾아서 4》, 청어람미디어, 2018


태그:#신안천사섬, #우이도, #문순득,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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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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