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30 14:49최종 업데이트 23.10.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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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큰아들은 어렸을 때 크게 아팠다. 6년간의 치료 과정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중학생이 됐을 때 아들은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했고, 고교생이 되자 간호사를 희망했다.

처음엔 다짜고짜 뜯어말렸다. 편한 일이라는 건 없지만 소방관이나 간호사는 여러 직업 중에서도 힘든 일 아닌가. 아들이 건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기 바랐다. 하지만 아들은 수시모집 대부분을 간호학과에 올인했다. 그리고 철썩 붙었다.


그 고집이 얼마나 밉던지 며칠 동안 말조차 섞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들은 '빚'을 갚으려 했다. 병원에서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나의 아들 '미스터 나이팅게일'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아들은 학창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음식점, 과외, 코로나19 선별진료소 등 공부시간 외에는 늘 돈벌이 현장에 있었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용돈벌이까지 나서는 아들의 열정은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시작한 알바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로 택시를 몰았다 ⓒ 픽사베이


대학 시절 막노동을 뛰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이었다. 그때의 현장 일은 지금에 비하면 완전히 후진적인, 살인적인 노동 강도였다. 레미콘 차량과 크레인이 없던 시절이어서 시멘트, 모래, 벽돌, 타일 등 무겁고 힘든 자재들을 사람이 직접 날랐다. 등짐을 메고 층높이가 높은 곳을 오를 땐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기억으로 은퇴 이후 막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레스토랑, 카페, 술집 등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고 택시운전도 했다. 친구들이 캠퍼스를 누비며 술을 마실 때 나는 매캐한 홀에서 술을 날랐다. 친구들이 여자들과 미팅할 때도 난 손님들과 미팅했다.

가끔 화가 나는 건 녀석들이 아르바이트 술집에 찾아와서 공짜 술을 잔뜩 먹고 갈 때였다. 그러면 난 가불(월급을 미리 당김)을 받아 술값을 메꿨다. 참으로 철없던 시절의 얘기다. 콧소리가 구성진 여주인은 '웨이터'인 나를 부를 때 '나 군아~'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면 "네~'하고 총총 뛰어갔다.

"나 군아, 저녁에 검사님이 오신단다. 잘 모셔라."
"나 군아, 공무원은 매상 올리기 힘들다. 비싼 안주를 권해. 알았지?"
"나 군아, 어제 왔던 아가씨들 또 온단다. 잘 맞춰드려."
 

그놈의 '나 군아, 나 군아, 나 군아'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술집에서의 특혜는 막간을 이용해 공짜 맥주를 실컷 마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여주인이 외출을 하면 몰래몰래 생맥주 기계에 입을 대고 케그(keg)에서 올라오는 거품맥주를 마셨다. 어떤 날엔 얼마나 마셨는지 새벽 퇴근 무렵 입에서 술 냄새가 났을 정도다. 거품맥주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틴 시절이다. 

1986년께에는 법인택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기본요금은 600원으로 짜장면값정도로 기억한다. 1일 2교대로 12시간 일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납금으로 6만 원 정도를 냈던 것 같다. 이 돈을 벌려면 기본요금으로 100명, 더블 가격으로 50명을 태워야 했다. 이외에도 차량 교대자에게 LPG 가스를 만땅(가득) 채워야 하고, 중간에 밥도 사 먹어야 하니 돈을 더 벌어야 겨우 수익이 생기는 구조였다. 언뜻 보면 남는 장사일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손에 돈을 쥘 수 없었다.

알바 보다 직업 갖기, 어떨까
 

서울 시내 한 카페에 붙은 아르바이트생 교육 관련 안내문 ⓒ 연합뉴스

 
결국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되도록 참고, 다른 기사들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쉴 때도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도 돈이 되질 않았다. 보통 열심히 뛰면 사납금과 가스비, 식대 값 정도는 벌린다. 그런데 그 돈을 맞추고 나면 피로감이 갑자기 밀려온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손님을 태우면 '내 돈'이 되는 것인데 목표가 채워진 이후엔 돈도 뭐도 싫어졌다. 그럴 땐 일을 접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일은 고되고 돈은 안 벌리고 시간은 많이 소요돼 별 재미가 없었다. 녹다운 된 것은 불과 한 달 반 사이였다. 사람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일은 진상손님을 상대하는 거였다. 술을 먹었든 안 먹었든 생떼부리는 작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야, 인마. 왜 이 길로 가는 거야? 요금 더 나오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난 이 길로 가본 적이 없어. 뭐 이런 개똥 같은 놈이 있어."

나는 오히려 손님 요금이 적게 나오도록 지름길로 가고 있는데, 처음 가는 길이라면서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흔했다. 어떤 손님은 삿대질에 주먹질을 하며 위협을 가했다. 그때부터 난 손님 배려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먼 길'로 돌아서 갔다. 가장 큰 곤욕은 취객이었다. 토악질을 해놓아 그날 일을 접고 차 청소에 나선 적도 있고, 돈이 없다며 요금을 안 주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파출소로 끌고 가 돈을 받았지만 그런 일이 잦자 나중엔 귀찮아졌다.

'그래, 잘 먹고 떨어져라. 자식아.'

택시 알바는 그렇게 욕만 배불리 먹고 끝났다. 푼돈은 손에 쥐었지만, 그뿐이었다.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직업을 찾는 데 도움이 된 시간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직업은 대략 1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사라지는 직업은 몇 개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한 사람은 평생 몇 가지 직업을 갖게 될까? 많아야 평생 2~3개 정도를  경험하지 않을까.

어떤 '직업'을 경험했느냐에 따라 인생의 여정은 때때로 만족스럽고 또 버겁다. 사람들은 어떤 직업인지 알게되면 '깐깐하겠군, 전략적이겠군, 감성적이겠군' 이라며 지레짐작 하기도 한다. 틀릴 때도 맞을 때도 있는 짐작들은 그만큼 직업이 한 사람을 대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알바를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과 내가 학비와 용돈을 벌며 고생했던 '고학생' 알바는 그냥 알바일 뿐이다. 몇몇 알바는 구하기도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다지만 기본적으로 문턱이 낮고 단기적이라고 알려져있다.

아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알바를 직장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선호한다"고 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는 독일어로 노동(Arbeit)이라는 뜻이다. 알바가 언제부터 생업이 아니라 부업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젊을 때 임시로 하는 일이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10대 청소년의 전단지 돌리기, 60대의 택배, 대학생과 주부의 파트타임, 일반노동자의 투잡과 해고 노동자의 생계 수단까지 알바는 도시의 밤낮에 여러 얼굴로 나타난다. 나 역시 알바를 거쳤다. 그런데 젊은 알바에게는 '젊을 때 사서 고생하지 말고, 젊을 때 고생해서 직업을 구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 자신의 노동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일, 괴롭기보다 일부분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일. 쓰다 보니 수십 년째 여전히 나도 찾는 바로 그 일을 업으로 갖기를 바란다. 2~3가지 직업을 거쳤으면서도 아직도 '직업'을 찾는 한 꼰대의 조심스러운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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