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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최근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교전으로 현지에서 철수하려던 일본인 51명을 군용기로 서울까지 이송했다. 인도적 조치에 많은 일본 시민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처음엔 한국에서도 대체로 잘했다는 평가 일색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자국민을 전세기로 이송했고 그것도 인근 두바이까지만 철수시킬 때도 돈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묘하게 분위기가 바뀐다.

일본 시민들은 한국의 '친절'과 대비되는 자국의 조치를 비판했고 일본 정부는 '자비 귀국하는 시민들과 형평성을 고려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 시민들 사이에서 반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금 한 푼 안 내는 일본 시민을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무료 이송해주냐!"

사회적 재난 참사 때마다 "피해자 지원과 보상에 세금을 쓰지 말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그랬고, 전세사기·이태원참사 등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왜 내가 낸 세금을 거기 써야 하냐.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댓글에는 어김없이 '누칼협'이란 말이 등장한다. '누가 (그걸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는 뜻이다. 네가 선택했으니 어떤 손해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은 사회적 성원권의 조건으로도 작동한다. 이주민에 대해서는 "세금도 안 내면서 무임승차한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8년 근로소득세 연말정산을 신고한 외국인 근로자는 57만 3325명으로 이들이 낸 근로소득세는 약 7836억 원에 이른다. 여기에 외국인이 낸 종합소득세 약 3793억 8600만 원을 합치면 1조 원이 넘는다. 이주민 뿐만 아니다. 코로나 지원금을 노점상에게 확대하자 자영업자들은 "노점상은 세금을 안 내는데 왜 지원하냐"고 주장했다.

심지어 세금은 "내가 낸 돈으로 먹고사는" 공무원에게 갑질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돈을 내지 않으면 아무 권리가 없으며 돈을 내면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다.

세금 낸 만큼 얻는 것이 정의인가
 
사회적 재난 참사 때마다 “피해자 지원과 보상에 세금을 쓰지 말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시장행위자-소비자로만 보는 사람은 각자도생과 약육강식 논리를 내면화하기 쉽다.
 사회적 재난 참사 때마다 “피해자 지원과 보상에 세금을 쓰지 말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시장행위자-소비자로만 보는 사람은 각자도생과 약육강식 논리를 내면화하기 쉽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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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개발독재 시기에는 '국민'이라는 강요된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압도했다. 지금 그 자리를 꿰찬 건 바로 소비자 정체성이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등가교환적 정의(Äquivalententausch innewohnende Gerechtigkeit) 1)가 핵심 원리로 작동한다.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에 따르면, 등가교환적 정의는 시장제도에 근거하며 이러한 정의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소유권 중심의 질서가 자연법처럼 정당화된다. 핵심은 개인의 권리를 상품의 논리, 즉 등가교환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이만큼의 의무를 다했으니 그만큼의 권리가 생긴다는 식이다. 이 논리구조 속에서는 1000을 가진 이는 1000의 권리를 가지고 1을 가진 이는 1의 권리를 가지는 게 '공정'하다.

등가교환적 정의가 소비자주의로 발현된다면 아마도 이런 명제가 될 것이다. "나는 구매했다. 고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장착하면 세금을 안 내거나 덜 내는 사람은 권리가 박탈되거나 줄어드는 게 당연해진다. 반대로 이런 논리대로면 세금을 많이 내면 권리도 더 많아져야 한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보면 "나는 세금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이 내는데 투표권이 빈민층·노숙자들과 똑같이 하나밖에 없는 건 부당하다"고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 수업 조모임부터 세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무임승차(free ride)일지 모른다. 세금을 이야기하면서 무임승차를 말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 문제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건물주의 불로소득, 다시 말해 경제적 지대추구(rent seeking)도 일종의 무임승차다. 사람들은 '갓물주'를 선망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무임승차에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적(axia)에 따른 분배'가 정의이며 "동등함에도 동등하지 않은 몫을,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분배받아 갖게 되는" 것은 부정의하다고 생각했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 tribuere)"이라는 신조는 <로마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에 표현된 이후 서구 사회의 관용구가 되었고 이러한 비례형평의 원칙은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 문화권에서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류학자의 관찰이나 게임이론가의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거나 순전히 이타적이기보다 대체로 호혜적인(reciprocal) 동물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부담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며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걸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례형평의 원칙이 절대로 깨져선 안 될 금과옥조는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학자들은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 지대 추구를 극히 혐오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모든 지대추구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예컨대 사회적 약자에게 경쟁에서 우선 순번을 부여하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도 따지고 보면 경제적 지대의 일종이다. 하지만 구조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공익적 효과,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분배적 정의의 실현을 고려하면 상당한 사회적 가치가 있다. 문제는 모든 지대추구가 아니라 승자독식과 부익부빈익빈을 낳는 지대추구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등가교환적 정의, 비례형평의 원칙, 지대추구 금지 등은 보편타당한 원칙이 아니다. 이 원칙들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영역도 분명히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정말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등가교환적 정의 같은 경제학적 관점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2)처럼 모든 비경제적 영역에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경향일지 모른다.

이토록 폭력적인 경제화

이와 관련해 참고할만한 개념이 경제학자 코라이 찰리쉬칸(Koray Çalişkan)과 미셸 칼롱(Michel Callon)이 제기한 '경제화(economization)'다. 경제화는 "사회과학자들과 시장행위자들에 의해 '경제적'이라고 묘사되는 행동, 장치, 분석적·실무적 설명의 자격 및 조합"을 뜻한다. 이는 경제적인 것을 통해 비경제적인 공간과 행위에 적합한 지식·형식·내용·지침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3) 경제화 과정을 거치면 모든 것은 비용-편익 게임으로 변환되고 당연히 인간 역시 한낱 '인적 자원'이 된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전부 경제 개념으로 환원하는 태도는 모든 걸 경제 논리의 식민지로 만든다. 경제적 이익이 없거나 손실이 발생하는 행위는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악'이 된다. "개인과 가족은 있지만 사회 같은 건 없다"고 말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경제화의 힘을 깊이 이해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는 대처 전 총리와 같은 관점에 명백히 반대하면서 윤리·존엄성 등의 가치가 경제적 수치로 환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지적한다. 그리고 법과 국가가 자기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나 과학기술에 위임하는 것은 결국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4)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시장행위자-소비자로만 보는 사람은 각자도생과 약육강식 논리를 내면화하기 쉽고, 끝내는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혐오하게 된다. 그런 사회는 끝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사람은 등가교환적 정의나 비례 형평의 원칙을 생각하며 물에 뛰어들지 않는다. 단지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의 얼굴에 감응해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진정 윤리적인 태도에는 경제학적 근거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윤리들이야말로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원 각자를 존엄하게 만든다.

1) 위르겐 하버마스, 1983, 《후기 자본주의 정당성 문제》, 종로서적, 28
2)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행인들을 붙잡아 자기 침대에 누인 뒤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내고 작으면 억지로 늘려서 죽였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이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자기 생각에 맞춰 남의 생각을 뜯어고치려는 행위를 뜻한다.
3) Çalışkan, K. & Callon. M., 2009, 'Economization, part 1: Shiftingattention from the economy towards processes of economization.Economy and Society', 38(3), 369~398.
4) 알랭 쉬피오, 2015, 《법률적 인간의 출현》, 184

덧붙이는 글 | 글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11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소비자주의,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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