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2 10:57최종 업데이트 23.11.0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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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과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 독립기념관


3대째 항일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의 일원이 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백범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김재호(1914~1976)다.

독립유공자 김재호에게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할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직후의 의병장인 김창균이고, 아버지는 1919년 광주장터 만세시위의 주역인 김복현이다.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의 딸이자 그의 부인인 신정원도 임시정부에서 함께 일했다. 명문가라는 말이 조금도 과하지 않은 가문이다.


그런 김재호의 독립운동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있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김재호 편과 독립기념관이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재호 편에 따르면, 그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직업적인 독립투사로 만드는 데 일조한 인물은 1912년생인 독립운동가 정의은이다.

<독립유공자공훈록> 김재호 편은 "1933년 2월경 상해에서 온 정의은과 같이 남경으로 가 의열단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의 훈련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재호 편은 그 뒤 그가 독립운동가 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 같은 데에 참여한 일을 설명하면서 "이 또한 정의은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평한다.

마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처럼 독립운동가 재목을 찾아내 중국 항일무대로 데려가는 정의은의 모습은 독립운동가 김승곤의 발자취에서도 확인된다. 김재호보다 1년 뒤인 1915년에 태어나 2008년 2월 24일 작고한 김승곤은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에서 일하다가 국군의 뿌리인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박정희 때인 1977년에 독립장이 수여됐고, 김영삼 정부 때인 1992년에 광복회장이 됐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승곤 편은 1933년에 김승곤이 의열단 간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5월 6일 국내에 파견된 조선의열단의 모집 연락원 정의은의 권유로 유학을 핑계로 고향집을 떠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뒤 "정의은이 국내에서 모집한 다른 5명과 함께 담양을 출발하여 광주·목포·부산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를 거쳐 같은 해 9월 13일 난징에 도착"해 간부학교에 들어갔다고 서술한다.

김재호와 김승곤에 관한 기록에서 증명되듯, 정의은은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가 유망주들을 만나 이들을 중국 무대로 인도하는 독립운동사자(使者)였다. 국내에 잠입해 운동자금을 거둬가는 사자도 있었고, 정의은처럼 운동자금이 아닌 운동가를 모셔가는 사자도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서훈 받지 못한 정의은
 

일제에 의해 투옥됐다 풀려난 1930년대 후반 무렵 정의은(오른쪽) 가족 사진 ⓒ 정승환


그런데 김재호나 김승곤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데 반해, 정작 정의은은 그런 공인을 받지 못했다. 정부의 공식 기록에 그의 독립운동이 명백히 드러나는데도 아직까지 그런 공인이 없었다.

이름만 알려지고 신원이 불투명해 사후에나마 서훈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인적 사항은 매우 확실하고 충분하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재호 편은 김재호의 중국 활동에서 "정의은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를 주선한 정의은이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군가의 작곡가인 정부은(일명 정율성)의 형이고, 또 정의은이 박건웅의 처남인 관계로 정의은의 권유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다."

지금 윤석열 정권과 극우세력의 집중포화를 받는 정율성은 딸 셋, 아들 다섯 중의 막내아들이었다. 정율성의 바로 위가 넷째아들인 정의은이다.

2009년에 <역사학연구> 제37집에 수록된 노기욱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은 정율성의 아버지인 정해업, 외삼촌인 최흥종, 누나인 정봉은, 큰형인 정효룡, 둘째형인 정충룡의 항일투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특히 셋째형 정의은은 배재고보를 거쳐 중국 남경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2기생으로 유대진·정부은·정대성이라는 3개의 가명을 사용하여 활동하였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의열단 간부학교 출신인 정의은은 운동자금 모집이 아닌 운동가 모집에서 성과를 일궈냈다. 그와 함께 운동가 모집에 나선 인물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이원록)다.

윤 정권하에서 정율성이 공격을 받는 데는 정의은의 '책임'도 적지 않다. 정율성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인들과 항일운동을 함께한 데는 정의은의 권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광주문화재단이 2018년에 펴낸 <정율성 음악세계와 현대성의 지평>에 수록된 이건상 전남일보사 편집경영총괄본부장의 논문 '정율성의 항일 형제들'은 "정의은은 정율성 형제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존재"라며 이렇게 말한다.

"장형 효룡과 둘째형 충룡으로 이어져온 중국 대륙에서의 독립투쟁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동생 율성을 중국으로 이끈 사람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봉은과 애국지사 박건웅 선생과의 부부의 인연도, 중국 3대 혁명음악가로 추앙받는 정율성의 빛나는 항일음악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의은이 아니었더라도 정율성과 중국 항일운동의 연결은 가능했겠지만, 바로 위의 형인 정의은의 권유가 있었기에 그 연결이 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졌으리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율성이 사후에 수모를 받는 데는 정의은의 '책임'도 적지 않은 셈이다.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일
 

1934년 군관학교 사건을 보도한 1934년 7월 18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항입한 군관생은 전도에 육십여명"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승곤 편에 "정의은이 국내에서 모집한 다른 5명과 함께 담양을 출발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정의은은 독립운동가 스카우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는 1934년 군관학교 사건에 연루된 데서도 느낄 수 있다.

그해 7월 18일 자 <조선일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사건은 정의은 같은 스카우트들이 국내에 잠입해 모집 활동을 하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위 이건상 논문에 따르면, 이 사건에 관한 일제 경찰 보고서 '군관학교 사건의 진상'에 정의은의 인적 사항이 나온다.

그 사건의 여파로 정의은은 그해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중국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런 뒤 국내에서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1970년대에는 광주에서 양계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것은 68세 때인 1980년 4월이다.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서적뿐 아니라 일제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로도 나타나듯이, 정의은은 부인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독립운동가 공인을 받지 못했다.

그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의향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손자 정승환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김승곤을 만나 독립유공자 지정에 관한 부탁을 한 일이 있었던 듯하다.

이건상 논문은 "정의은은 김 전 회장을 만나 독립유공자 지정과 관련, 의열단 등 다양한 항일활동에 대한 증언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의은의 매개로 중국 항일무대에 진출한 김승곤은 박정희 시절인 1977년에 서훈을 받았다. 그런 김승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승곤 편에 정의은과의 인연이 언급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승곤은 자신이 정의은에 의해 중국으로 인도된 사실을 인정했다. 김승곤이 이 사실을 부인했다면 그에 관한 공식 기록에 정의은의 이름이 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증언을 거부한 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 논문은 "해방 후 정의은과 김 전 회장은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라고 알려준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정의은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포기했다고 한다. 정승환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기록물을 손수 없애고 수해로 집안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서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정의은에 관한 기록이 자손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일제 경찰에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일은 후손들의 몫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정부의 몫이다. 공식 문건들을 통해 독립운동 헌신이 쉽게 확인되는 정의은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의 책임 방기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보훈부가 백선엽 같은 친일파를 미화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게 과연 옳은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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