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난여름부터 한 약속이다. 우리 한번 모여서 연극 보러 가자고 날을 잡았다. 한 친구가 연극을 추천했고 예매의 수고까지 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이미 도착했다. 공원의 작은 광장에서는 거리 공연이 있었다. 나는 약속 시간을 딱 맞춰 가서 공연은 못 보았다. 아쉬웠다. 20대에 친구로 맺어진 인연인데,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연극을 보고,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이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동안의 삶의 모습은 다소 달랐을지언정 초등교사로 살아온 시간들은 공통이다. 눈빛만 봐도 무엇이 고충인지, 무엇이 즐거움인지 알 수 있는 관계가 친구 관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년에 필요한 것은 친구, 딸, 돈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도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한다. 오랜만의 외출에 딸아이가 내 옷차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 주었다. 가을, 연극 관람, 친구 등의 콘셉트에 맞는 옷을 고르느라 아침에 한참 수선을 떨었더랬다.
 
연극 <뷰티풀 라이프> 서울 혜화동 JTN아트홀에서 공연중.

▲ 연극 <뷰티풀 라이프> 서울 혜화동 JTN아트홀에서 공연중. ⓒ 지안컴퍼니

 

친구의 손을 잡고 JTN아트홀 4관에 들어갔다. 규모가 큰 공연장이었다. 연령대가 매우 다양했다. 그래도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머리를 이고 있는 늙수그레한 사람들이었다. 연극의 제목은 <뷰티풀 라이프>. 무덤덤하게 노년을 살고 있는 부부에게도 빛나는 청춘이 있다.

가슴 뜨겁던 사랑이 찾아와 만났다. 한순간도 못 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에서 만났다. 청년 춘식이는 학업과 직장을 찾아 서울로 갔다. 가난한 처녀 순옥이는 공장에 다녔다. 헤어지던 날 급박한 상황에서 주소가 잘못 전달되어 춘식이의 연애편지가 엉뚱한 집으로 배달되었다. 순옥이는 오지 않는 편지로 인해 잊힌 사람이 된 줄로 알고 춘식이를 원망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오해는 풀리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 같이 오래도록 살고 싶어서 결혼도 했다.

장밋빛 결혼생활일 줄 알았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건 환상이었다. 남편 춘식은 낚시에 빠져 버렸다. 아내 순옥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남편은 가정을 살뜰히 돌보지 않았다.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의 고군분투가 그려졌다. 아내의 실명으로 남편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 가정이 되살아났다. 서로 살갑게 살아가는 모습이 애틋하다. 분가한 아들내외에게도 다정하고 무엇보다 며느리와의 관계도 그만하면 원만했다.

이 연극이 특이한 게 배우 두 사람이 이 역할들을 모두 소화해 낸다는 점이다. 청년시절부터 노년시절까지의 모든 부부역할, 중2아들 역할, 며느리 역할도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배우의 연기력과 분장이 탁월했다. 폭넓은 연령대를 아우르는 스토리에다가 폭넓은 연령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력을 감상할 수 있다.

90분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무대에 펼쳐지는 부부의 희로애락이 바로 우리의 희로애락이었다. 배꼽이 춤을 추다가 달아날까 봐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옆 사람에게 눈물이 튈까 봐 눈물을 찍어내며 울기도 했다. 내 표현이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웃고 울었던 연극이었다.

아내를 사랑한 늙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눈먼 아내만 남았다. 실명한 아내는 남편이 좋아했던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작사 작곡) 노래를 즐겨 듣게 되었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늙은 아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사랑을 추억하는 노년의 순옥이 모습을 끝으로 연극은 끝난다. 그렇더라도 그녀의 뷰티풀 라이프는 이어질 것이다. 남편과의 사랑을 기억하는 한은. 
 
연극 <뷰티풀 라이프>  연극이 끝나고, 배우와 관객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 연극 <뷰티풀 라이프> 연극이 끝나고, 배우와 관객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 강지영

 
연극이 끝나고 우리들은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 학림다방'을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입구에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많았다. 대기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서로 토닥이고 다음을 기약했다. 나중에 만날 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만나는 순간까지 얼마나 설레는가. 대신 우리는 '현대식 카페'에 가서 '그야말로 옛날식 대화'를 나누었다. 20대 학창 시절 얘기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다로 흘러간 강물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도 마찬가지. 지금 이 순간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음이 뷰티풀 라이프가 아니겠나.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는 염원하던 내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영원히 추억 속에 잠길 어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지 말자, 내 마음을 다잡아 본다. 아름다운 인생, 그것은 바로 여기 이 순간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스토리에 중복게재합니다.
연극 뷰티풀라이프 JTN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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