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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협주곡 4번 바단조. 비발디가 300년 전에 작곡한 '겨울'이다. '사계'에는 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짧은 시(소네트)가 계절마다 붙어 있다. 제2악장의 소네트(Sonnet)는 이렇다. '집안의 난롯가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밖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음악이 흐르는 이곳 정원엔 눈이 내린다.

첫눈치곤 꽤 굵은 눈발이다. 펑펑 쏟아져 순식간에 잔디마당을 덮고 먼 산도 하얗게 칠했다. 눈에 젖은 고양이 한 마리가 데크로 올라와 잠시 앉더니 이내 마당을 가로질러 멀리 대문으로 나간다. 날씨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다. 걱정이 많은 것은 사람뿐인가 보다.

계속된 추위에 단풍나무 안쪽까지 붉게 물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 단박에 달라졌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살다 보면 순식간에 꺾이는 지점이 있다. 문득 들여다본 거울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느끼는 세월여류(歲月如流) 같은 것 말이다. 돈도, 건강도, 사랑도, 행복도 늘 무난하기가 더 어렵다.

배롱나무와 모과나무는 제 잎을 모두 떨구었다. 다른 것들은 아직 푸름을 움켜쥐고 있다. 때가 이를 뿐, 활엽수들은 계절의 끝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꾸밈없이 솔직하게 제 속을 드러낸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이처럼 후련하게 허울을 벗어던져 본 적이 있었나 돌아본다.

이런, 배추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내일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비발디 보단 배추지'. 눈발을 헤치고 얼른 눈에 띄는 대로 비료 포대를 갖다 덮는다. 왠지 허접해 다시 나가서 방수포로 덮고 날아가지 않게 고정한다. 늘 이 모양이다. 닥쳐서 하고, 한 번에 끝내지 못해 다시 손을 본다. 눈을 더 맞을 뿐 그렇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다.

꽃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메리골드만 여전하다. 갸륵해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모양도 색의 배열도 모두 다르다. 그 꽃이니 다 같다고 예단해 버리면 자세히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사과'하면 '빨갛고 동그랗다'는 이미지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생김새도 중요하지만 맛은 제각기 다르고 복합적이다. 우리가 그 다름을 표현해 낼 수 있다면 달리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빨갛지도 동그랗지만도 않다.

이 정원에 이파리 하나, 꽃 한 송이도 똑같은 것은 없다. 사람도 그렇다. 지문이 증명하듯 모두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게 태어났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자존감과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할 근거다. 물론 우리 사회는 다른 누구를 닮도록 부추기고 심지어 강요하지만 말이다.
 
첫눈 내린 정원 풍경
 첫눈 내린 정원 풍경
ⓒ 김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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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붉고 푸른 정원으로 퍼붓던 눈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금세 해가 난다. 다시 흐려져 비 오고 눈이 녹으니 황금빛 잔디마당이 드러난다. 정말 변화무쌍한 날씨다. 자연스럽다기엔 너무 극단을 오간다. '그럴 수 있어' 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불안감을 담으면 심상치 않은 일기다.

최근 인공지능(AI)이 편곡한 '사계 2050'이 화제다. KAIST가 2050년 대전의 기후 예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비발디의 '사계'다. 챗GPT-4의 '여름' 소네트는 이렇다. '무자비한 여름 태양 아래, 시민과 나무들 모두 시든다', '나무들은 갈라지고 있다', '지친 몸은 생물다양성의 붕괴로 벌레와 말벌 떼 때문에 고통받고, 번개와 요란한 천둥이 두려워 휴식을 찾지 못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휘청인다. 추운 계절에 드니 난방에 민감하다. 1℃ 차이에 집안 온기가 다르다. 기후위기도 그 1℃의 변곡점 앞에 선 느낌인데 대처하는 모습은 꼭 눈 내리는 배추밭의 내 꼴이다. 이따금 우리의 미래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고통이 오기 전엔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화분 식물들을 실내로 들여놓는다. 밖에서 겨울나기 어려운 것들이다. 어디에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위치가 삶을 바꾼다. 어디에 사는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모두 시골로 오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도시를 넓히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자. 비발디 '사계'를 원곡으로 계속 들을 수 있도록.

태그:#정원, #비발디, #겨울, #초상,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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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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