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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기차길 위에서 밀어 넣어 수장한 옹벽
 기차길 위에서 밀어 넣어 수장한 옹벽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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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안태리 834번지 전경 모습. 동촌마을 골짜기 대밭 숲 학살지
 삼랑진 안태리 834번지 전경 모습. 동촌마을 골짜기 대밭 숲 학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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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리 동촌마을 학살지를 찾아서

서둘러 경남 밀양 안태리 동촌마을 학살지를 향했다. 동촌마을에서 2km 정도 이상 가파른 길을 구불구불 첩첩산중으로 깊숙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학살지 장소로 적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축사 바로 옆 '대밭 계곡이 학살장소'라고 한다. 대밭 속을 자세히 보니까 계곡이 아주 깊어 보였다.
 
좌)학살장소는 깊은 계곡에 대나무가 무성히 서 있고 표지판 하나 없는 모습
 좌)학살장소는 깊은 계곡에 대나무가 무성히 서 있고 표지판 하나 없는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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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이정우는 2019년도 이틀에 걸쳐 답사한 경험이 있었다.

"동네 형님을 통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물어서 학살지 장소를 알게 됐어요. 동네 형님이 안태리 동촌마을에 살아서 잘 알고 있었거든요. 이곳은 골짜기가 언 듯 봐도 첩첩산중 계곡이 많지요? 당시 최소한 여러 곳(최소한 3곳)에서 학살지로 활용됐다고 볼 수 있어요. 골짜기마다 내려오는 검붉은 핏물이 동네 개울로 줄줄 흘러내렸다고 형님이 얘기했어요."

이곳은 학살한 뒤 시신을 찾았는데 "머리에 대못이 박힌 시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장면은 당시 학살자들의 잔혹함과 증오감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에서 총알이 아까워 도끼, 낫, 칼, 괭이 등으로 쳐서 죽인 건 알고 있었지만, 대못을 머리에 박아 죽인 것은 처음 들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건 잔혹하지 않은 건 없다. 학살자들의 행위는 미치광이가 발악한 것 같다. 필자는 안태리 학살지에 '표지판' 하나 없이 구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섬뜩한 안태리 학살지를 뒤로 하고 '작원관지' 수장지로 향했다.
 
(좌) 작원관지(삼랑진 검세리 산134-2번지) (우) 양산군 원동면 중리마을 모래톱 모습
 (좌) 작원관지(삼랑진 검세리 산134-2번지) (우) 양산군 원동면 중리마을 모래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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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하류 '작원관지'(주1)수장지를 찾아서

낙동강 하류 수장한 장소를 찾아가면서 필자는 이정우께 어떻게 작원관지(낙동강 수장사건)에 대해 어떻게 자세히 알게 됐냐고 물었다. 증언자는 초∙중학교 때 원동면 중리마을에 큰 이모님(최태호)이 살고 계신데, 기찻길 따라 걸어 이모님 댁에 자주 다녀서 이모님한테 들었다고 한다.
 
기차 터널 아래 굴다리 앞에서 드러나는 낙동강 하류 강물 모습
 기차 터널 아래 굴다리 앞에서 드러나는 낙동강 하류 강물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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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시킨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 모습 (폭 150m~200m, 높이 20m, 물의 깊이 4~5m)
 수장시킨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 모습 (폭 150m~200m, 높이 20m, 물의 깊이 4~5m)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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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지에서 낙동강 하류까지 약 36km까지 자전거 도로로 잘 단장돼 전경이 아주 멋있었다. 이곳 한밤중에 기차로 데려와서 끌어 옹벽 위 세워서 총을 쏘아 수장했고, 또는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죽은 사람을 낙동강 물에 던져서 고기밥이 됐다고 한다.(주2) 이정우가 말했다.

"작원관지에는 기차 터널이 작원마을 쪽 짧은 터널과 시루봉을 지나는 긴 터널이 있는데 긴 터널 지나면 양산시 원동면 중리마을이 있어요. 시루봉 긴 터널 앞에 약 20m 높이의 콘크리트 옹벽이 강으로 바로 맞닿아 있는데 여기서 두 손을 뒤로 묶은 후 강으로 밀어 넣어 보도연맹원들을 수장했대요.

작원관지 출발점에서 옹벽을 지나 중리마을 모래톱까지의 거리는 2.5km 정도이고. 그중 강이 바로 맞닿아 학살해서 수장할 수 있는 곳은 여기 옹벽(150m~200m) 구간 뿐이예요. 자세히 보세요. 여기 구간 이외 옹벽들은 직접 강에 닿지 않아서 사람을 밀어 넣으면 땅바닥에 닿거나 나무에 걸려 수장이 될 수 없는 곳이잖아요. 2019년 6월 답사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 외는 없었어요. 사전에 엄밀히 계획하고 준비한 사건이었어요."

마지막 시신이 떠내려와 걸려 있던 모래톱을 찾아서
 
옛 모래톱 모습(좌) 4대강 사업 후 현재 모래톱의 모습(중?우)
 옛 모래톱 모습(좌) 4대강 사업 후 현재 모래톱의 모습(중?우)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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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신이 떠내려왔다는 중리마을 모래톱으로 향한다. 이정우가 말했다.

"저는 초∙중학교 때 철길 따라 걸어서 이모댁에 자주 다녔어요. 모래톱은 아주 넓어서 높은 곳은 포도, 수박, 고구마 등 작물을 심었고 낮은 곳은 재첩, 조개 백합, 잉어 등 잡으면서 수영도 하고 놀 았어요. 어릴 때 (양산시 원동면 중리마을) 이모댁에 자주 갔는데 모래톱에 이모 밭이 있었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모래톱 밭에 나가보니 작원관지에서 수장된 시신들이 모래톱에 걸렸더래요. 시신을 보는 순간 장사는커녕 빨갱이로 몰리는 살벌한 시기라 집에서 가지고 나온 장대로 시신을 낙동강 물에 밀어 넣어 떠내려 보냈대요."

나는 "그 시신들이 어디로 갔을까" 물었다. 이정우가 답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낙동강에서 다대포를 지나 시속 3~4km로 가면 다대포에서 대마도까지 거리는 50km 정도인데 하루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겠네요" 한다.

그래서 경남지역 마산, 통영, 거제, 낙동강 등 중부 경남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바다에 수장된 경우가 많았다. 수장을 얼마나 많이 시켰는지 시신 중 일부가 물살이 드세기로 이름난 대한해협을 지나 일본 대마도 해안까지 밀려가서 일본 어민들에 의해 시신이 인양돼 현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전경(옹벽에서 바라본 강 건너)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전경(옹벽에서 바라본 강 건너)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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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답사를 마무리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건너편 도요리 마을이 고요하고 인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수장 당시 한밤중에 기찻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총 쏘는 소리는 분명 들었을 것이면 고요한 마을이 긴장과 공포 속으로 휘몰아쳤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이정우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진주로 향했다.

맺는말

밀양 답사에서 감금하고 구금한 장소가 많아 그 당시 집단 수용돼 있는 동안 인권침해, 특히 고문의 과정에서 그리고 학살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독일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엘리 위젤의 <나이트> 속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 되고 제복차림의 잘 훈련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세계, 죄 없는 어린이와 허약한 노인이 죽어가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미친 세계를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필자가 발굴 다니면서 느낀 것이 "학살현장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단어를 구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약산 김원봉 동생 네 명 형제의 학살 사연, 1960년대 부관참시 당한 사건을 전하고자 한다.

[각주]
주1) 작원관지(鵲院關址): 영남대로에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조선시대 2대 관문(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이었던 작원관(鵲院關)의 옛터, 임진왜란 때 전적지.
주2) 신기철, <한국전쟁 전후 백만 민간인 학살의 진실>,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2017년 3월 16일.
주3)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역사비평사, 2002년 5월 15일


* 23화 밀양편(약산 4형제 학살)이 계속됩니다.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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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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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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