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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편집자말]
김용건 약산 김원봉 큰아버지 안내판에 손을 올려놓고 의젓한 모습
 김용건 약산 김원봉 큰아버지 안내판에 손을 올려놓고 의젓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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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약산 혈육들이 당한 고통 https://omn.kr/278kx

4.19혁명(주1) 직후 밀양 유족들의 들끓는 소리

당시 밀양 유족들이 밀양경찰서에 몰려가서 항의하자 사찰 계장 나아무개씨가 삼랑진 미전고개와 청도군 곰티재에서 학살했다고 자백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족들은 소복을 차려입고 직접 매장지로 가 유해를 찾기 시작했다. 김봉철(백부)은 장례위원장을 맡아서 장례식을 추진했다.

그 결과 미전고개 150구, 곰티재 180구 등 모두 330구를 발굴해 밀양공설운동장에 모셔놓고 밤새워 개체수를 분리하고 수십 개의 목관을 만들어 유골을 관에 넣은 뒤 위령제와 군민 합동 장례식을 지냈다. 이후 약산 김원봉 선산(부북면 용지리 163-2)에 합동 묘지를 만들어 안치했다.
 
1960년 청도군 매산면 곰티재에서 유골을 수습 중인 소복 입은 유가족들의 모습(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1960년 청도군 매산면 곰티재에서 유골을 수습 중인 소복 입은 유가족들의 모습(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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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20일 밀양공설운동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만장기 장례 행렬이 밀양 읍내를 지나는 모습(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1960년 7월 20일 밀양공설운동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만장기 장례 행렬이 밀양 읍내를 지나는 모습(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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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읍내 도로 가득 메운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장례 행렬(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밀양 읍내 도로 가득 메운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장례 행렬(사진 제공: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 진실규명 결정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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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발생

그러나 박정희 5.16 쿠테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이 피해자들을 예비검속한 후 '혁명재판소'에 회부해 소급법인 특별법을 적용, '소급효 금지의 원칙' 및 '증거재판주의' 위반으로 사형 등 중형을 선고해 복역케 하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군경에게 집단 살해된 피학살자들의 유골과 합동 묘비를 경찰이 강제로 훼손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중대한 인권 침해행위로 확인하고 진실규명으로 결정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 취하도록 권한 사례(주2)를 적용시켰다.

약산의 혈육으로 지독한 이념의 고리

이듬해 1961년 5.16 쿠테타 세력은 김봉철(6남)을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주도한 인물로 체포해 '혁명 포고령 위반죄'를 적용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김봉철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규명 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 재심소송 비용으로 사용해 항소심에서 6년 7개월로 감형받았다.
 
진실규명 대상자 재판결과
 진실규명 대상자 재판결과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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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약산이 숙청당한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혈육이념의 고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김봉철은 1968년에 출소해 보니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내가 살던 정든 땅 밀양에서 내 어이 이 땅을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한탄했다. 군사독재의 감시 속에서 하루하루 여생을 술과 함께 박정희 욕을 섞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살다가 끝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조카들도 모두 연좌제에 신음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었다.
   
(좌) 선산 부북면 용지리 163-2 아래 학봉여사 묘지 (우) 이준설(왼쪽) 이정우(오른쪽) 합동묘지 찾으러 가는 모습
 (좌) 선산 부북면 용지리 163-2 아래 학봉여사 묘지 (우) 이준설(왼쪽) 이정우(오른쪽) 합동묘지 찾으러 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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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살생부의 흔적, 합동묘지를 찾아서

합동 묘지에 안치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5.16쿠테타로 권력을 탈취한 박정희 일당이 '합동 묘지'를 파헤쳐서 330여 구의 유해를 부관참시(剖棺斬屍) 후 화형(火形)했다. 유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것도 모자라 두 번 죽이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찾아갔다. 필자가 두 번째 답사로 이곳을 찾았지만, 전화상으로 합동 묘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실패했다. 그래서 김용건님에게 밀양 선산에 내려와 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드렸더니 쉽게 허락해 세 번째 답사 날 드디어 밀양역에서 상봉했다.

필자는 통화만 몇 차례하곤 처음 뵙는 김용건님 일행을 밀양역에서 만난 뒤 김주익 할아버지 제적등본을 발급받기 위해 밀양시청으로 향한다.
 
김주익 할아버지 제적등본에서 약산 김원봉 제적등본을 보는 순간. 왼쪽 필자, 오른쪽 김용건
 김주익 할아버지 제적등본에서 약산 김원봉 제적등본을 보는 순간. 왼쪽 필자, 오른쪽 김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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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적등본 속 김원봉 제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제적등본을 발급받고 바로 선산을 향했다. 합동묘지 장소를 찾으면 임시표지판을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므로 간단히 내용을 써서 준비했다.

합동묘지 장소를 찾는 데 동행한 김봉철님 큰딸이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때 공설운동장에서 아버지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시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유명하신 분이구나 생각만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공설운동장에서 시발택시를 타고 합동묘지까지 따라왔어요'라고 한다.
 
 60년간 합동묘지 방치된 곳을 찾는 모습.(왼쪽) 사촌 여동생과 함께 목례하는 모습(오른쪽)
  60년간 합동묘지 방치된 곳을 찾는 모습.(왼쪽) 사촌 여동생과 함께 목례하는 모습(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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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합동묘지 자리가 바로 여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김용건도 '이곳이 맞는데 주변에 새로운 타인들의 새 묘지가 생겼고 오랜 시일이 지나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두 분의 기억으로 겨우 장소를 찾았을 때 매우 감동적이었다. 60년이 넘게 흔적을 찾지도 못하고 방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장소를 자세히 보니 파묘 흙이 인위적으로 양쪽에 솟아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준비한 자료를 설치하고 간단히 막걸리 한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김용건과 '역사적인 한 장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게 돼 필자는 매우 만족스럽고 흐뭇했다. 간단한 채록과 질문지를 준비해 뜻있고 의미 있는 장소인 의열기념관으로 출발했다.
 
밀양 의열 체험관(왼족), 의열기념관?의열 기념탑과 조각품이 전시된 모습(오른쪽)
 밀양 의열 체험관(왼족), 의열기념관?의열 기념탑과 조각품이 전시된 모습(오른쪽)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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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기념관 내부 옥상 바닥에서 대화와 채록을 하는 모습
 의열기념관 내부 옥상 바닥에서 대화와 채록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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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기념관 입구에서 필자와 김용건
 의열기념관 입구에서 필자와 김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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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의열기념관으로

만남의 장소로 의열기념관이 의미가 있을 듯해 학예사(이준설)와 상의한 뒤 의열기념관 옥상에서 채록하기로 했다. 2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채록을 마친 후 그리고 의열기념관에서 간단한 기념 촬영도 했다. 의열기념관은 약산이 태어난 생가 터다. 필자는 김용건님께 '의열기념관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물었다. "그래도 밀양 땅에 의열기념관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라고 한다. 큰아버지로 인한 가족들의 상흔을 생각하면 때론 원망도 했지만, 역사 교과서에 서술돼 있는 것 보면 뿌듯하고 감회가 깊다고 한다.
 
답사온 홍익대 부속 고교 학생들과 약산 조카들의 만남
 답사온 홍익대 부속 고교 학생들과 약산 조카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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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의열기념관에 견학 온 서울 홍익대 부속 고교 학생들을 만나게 돼 약산의 친조카라고 소개하니까 학생들이 환호와 손뼉을 치며 반긴다. 이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약산의 친조카 만남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뜻있는 만남을 뒤로 하고 여동생들이 큰어머니 묘지에 가보고 싶다고 해 박차정 묘지를 향했다.
 
큰어머니 박차정 여사 묘지 모습
 큰어머니 박차정 여사 묘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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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의 처 박차정 묘지를 찾아서

필자는 과거에 박차정 묘지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묘지가 허름하고 아주 초라했다. 그런데 밀양시청에서 노력해 잘 단장된 모습으로 바꿔서 아주 흐뭇하였다. 매년 시민단체에서 성묘도 하는 모습을 봐왔다. 해질 무렵이라 서둘러 내려와서 함께 식사 후 김용건님은 서울행 오후 6시 50분 열차를 타기 위해 밀양역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렇게 70년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만남은 기약 없이 막을 내렸다.

필자는 전국으로 자원봉사 유해 발굴을 다니면서 한탄이 절로 나왔지만, 경남지역의 학살지와 유족을 만나고 찾아다니면서 분노와 비통함이, 서린 마음이 더욱 들끓게 됐다. 왜냐하면 유족들을 두 번 죽이는, 5.16쿠테타 이후 박정희 일당은 경남 전역에 합동묘지를, 총화(銃火)와 휘발유로 쏘아죽이고 태워 죽인 사연과 묘지를 찾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민족도 그렇게 '무차별 사살'을 '두 번'이나 하지 않는다. 학살당한 자는 조국을 무어라 부르며 쓰러졌을까!

유족들은 '혁명재판'에서 "사형이나 구형이 선고"됐다. 경남교육청의 한 장학사는 경남∙경북지역은 유일하게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건이 은폐되고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규정한다. 사실이다.

경남도민 여러분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아픈 역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25화 진주 봉강리편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주1) 1960년 4.19혁명 요지(3월15일 이승만 부정선거, 제1차 마산 시위, 4월11일 김주열 학생 시신 발견, 제2차 마산 시위→전국시위확대, 4월18일 고려대학생 피습사건, 4월 19일 혁명 발발, 4월 24일 자유당 총재직 사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주2) 1기 위원회→제3부 제3소위원회 사건, <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12.04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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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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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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