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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것인가, 망각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 누군가 두 기로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망각을 선택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구나 그것이 1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목격자도, 유가족도 모두 세상을 떠난 일이라면 더더구나. 없었던 일로 하자며 망각을 선택하는 순간, 세월이 더 흐르면 진짜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반면 기억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암실에서 점차 사진 이미지가 드러나듯이 흐릿했던 일들이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나의 기억이 너의 기억을 부르면서 기억이 연대를 이뤄 진상과 진실의 모자이크가 완성되어 간다. 

관동(간토)대학살에 관한 일이 그렇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의 초유의 지진이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14만명의 사람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고 3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달리 손 써 볼 수 없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재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있는 일인 양 천인공노의 억지를 부렸다. 대지진을 대학살로 몰아간 것이다.  

지진 발생 하루가 지나자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지진의 혼란을 틈타 재일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다니니 조선인은 무조건,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진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는 민심을 돌리고 희생양을 날조하여 분노를 그리로 쏟게 하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이요, 유언비어가 사실상 정부에 의해 날조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6661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관동 지역 조선인의 무려 33%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처참히 죽어갔다. 식민지 수탈로 굶는 일이 다반사라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기에, 최밑바닥 노동이나마 하면 고향의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기에 일본에 와서 고생하던 죄 없는 조선인들이 그렇게 죽어갔지만 유해조차 갈갈이 찢기거나 불에 태워져 학살의 증거가 묻힌 채 100년이 흐른 것이다 .  

그럼에도 망각이 아닌 기억을 선택한 사람들은 100년 전의 실낱 같은 흔적이나마 찾고 모아, 조선인 학살의 진상파악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추모단체 봉선화회가 세운 도쿄 아라카와 강 인근의 조선인 위령비에 두 손을 모은 일본 여성들. 이번 전시작품 중 하나.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추모단체 봉선화회가 세운 도쿄 아라카와 강 인근의 조선인 위령비에 두 손을 모은 일본 여성들. 이번 전시작품 중 하나.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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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인 2023년 9월 3일,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 내 '1923한일추모사업단'의 대표 함인숙 목사가 주축이 되어 도쿄 아라카와 둔치에서 '간토 대학살 100주기 추도위령제'가 열렸다. 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모여 6661장의 넋전을 달고, 양혜경(항일독립여성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선생의 넋전 춤과, 공주 상여소리 보존회에서 재연한 상여모심을 통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간토 대학살에 대한 진실규명 및 용서와 화해를 기원했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 낸 장영식 작가의 전시회가 열린다. 사진전의 제목 <넋은 예 있으니>처럼 추도위령제 동안 6661명의 가신 님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바람으로 오신 듯 넋전 안에서 안식하며 장엄한 장례로 모셔졌고, 그 감동적인 순간은 도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산장에서의 화장으로 이어졌다.

장 작가는 넋전들이 정화되어 하얀 재로 승화될 때까지의 전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소리 없는 오열이자 100년의 긴 침묵을 깨는 추도 행위를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참 부끄러운 전시다. 100년 동안 한일 그 어느 정부도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침묵해 온 죽음들이다. 2023년 9월 도쿄 아라카와강 추도위령제 4박 5일의 여정을 마치고도 두 번 더 일본을 방문하여 조선인들이 대거 학살된 스미다강을 찾아 새벽에 하염없이 두 차례나 강변을 걸었다. 그럼에도 가신 분들의 한 맺힌 죽음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며 안타까이 회상했다. 

이어 작가는 "이 작은 사진전이 100년 전 조국과 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갔던 넋들을 위로하며, 일본이 저지르고 조작한 과오를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적 기억으로 불러들임으로써 망각의 역사가 지배하는 왜곡된 현실을 성찰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한일 양 국민들 사이의 역사적 인식의 경계를 좁히고, 미래를 향한 화해와 용서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장영식 작가는 존재의 가장자리에 놓인 작고 미미한 것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 탈핵운동, 노동자들의 힘든 삶의 현장, 그리고 환경과 평화를 외치는 이들의 모습 등을 그만의 렌즈에 담아 전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계지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순간들을 섬세한 사진과 글로 보여주면서, 내면의 양심을 일깨우는 따뜻함을 전한다. 현장 속에서 그의 생생한 시선은 단절된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소통의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이웃들에게 정의와 희망의 장을 펼쳐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게 한다.

 
간토대학살 100주기 추모위령제 기록 사진전 '넋은 예 있으니'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2월 21일(수)~3월 5일(화)에 열린다.
 간토대학살 100주기 추모위령제 기록 사진전 '넋은 예 있으니'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2월 21일(수)~3월 5일(화)에 열린다.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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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 망각과 기억 중에서 기억을 택하는 것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게 장작가의 소신이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렌즈와 한 몸이 되어, 한 세기를 지나 또 다른 한 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한일 간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길을 찾아 또 길을 떠난다. 

장영식 작가의 사진전 <넋은 예 있으니>는 오는 2월 21일부터 3월 5일(관람시간 ; 오전 11시~ 오후 6시)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45, 3층)에서 열린다. 전시오프닝은 2월 21일(수) 오후 5시.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태그:#관동대학살,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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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저서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강치의 바다』 『사임당의 비밀편지』 『내 안에 개있다』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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