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슬럼프

닥터 슬럼프 ⓒ jtbc

 
볕 좋은 병원 앞 벤치에 남하늘(박신혜 분)과 여정우(박형식 분)가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정신과 병원에서 받아온 약 봉지를 열어 입에 털어넣는다. 그리고 마주 보며 미소짓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다. 이미 남하늘은 '우울증'으로 자신이 다니던 병원을 그만둔 상태다. 정신 병원에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남하늘은 '내가 왜?'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집에 돌아오는 도중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좀 쉬면 낫겠지'했다. 하지만 남하늘은 약을 버리지 않았다. 옷장 속 깊숙이 숨겨두기는 했지만 열심히 약도 먹고 병원도 가는 중이다. 
 
자신의 집 옥상으로 이사온 여정우, 학교 다닐 때 앙숙이던 그와 처음에는 본의 아니게,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고 이제는 '네가 좋다'며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을 때, 남하늘의 눈에 여정우의 병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밤 잠을 잘 못 들고 악몽을 꾼다는 여정우, 남하늘이 보기엔 PTSD인 듯 보였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튜브까지 하면서 잘 나가던 성형외과 의사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료 사고로 가진 모든 걸 다 잃고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니 그런 병이 오지 않는 게 외려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남하늘이 여정우에게 혹시 PTSD가 아닌가 하며 병원을 소개해주겠다고 하자, 정색을 한다. 내가 왜? 난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랬던 여정우가 다음 날 남하늘과 함께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는다. 보기 드문 '연애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서 남하늘과 여정우의 사랑이 이쁘다. 

쓰러진 김에 쉬어가 
 
 닥터 슬럼프

닥터 슬럼프 ⓒ jtbc

 
물론 여기까지가 쉬운 건 아니었다. 병원을 그만둔 남하늘, 그리고 가진 걸 모두 잃은 여정우가 아래 윗집에 살게 되자 두 사람은 학창 시절 전교 1등, 전국 1등을 두고 경쟁하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남하늘은 당장 자신의 집에서 나가달라 했고, 여정우는 호기롭게 그러마고 했다. 

하지만 동네방네 범죄자로 소문난 여정우는 돈도 돈이지만 그에게 방을 내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여정우는 우연히 자신에게 으르렁대던 남하늘이 우울증으로 병원조차 그만두게 된 사정을 알게 된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슬럼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함께 술을 마시고 밤을 새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어린 시절부터 넉넉치 않은 가정 형편에 오로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며 의사가 되었던 남하늘을 남하늘의 경쟁자였기에 그녀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며 노력했는가를 여정우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정우는 남하늘이 지금껏 공부하느라 해본 적 없는 것들을 함께 한다. 오락실도, 노래방도, 게임장도, 그리고 바다에서 해뜨는 것을 보는 것까지. 그리고 남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쓰러진 김에 쉬어 가라고. 

아마도 '쓰러진 김에 쉬어 가라'는 말을 전한 게 여정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하늘이 그 한 마디에 그토록 가슴이 울렸을까. 어쩌면 자신보다 여정우가 더 힘들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아는 여정우였기에 남하늘은 그 한 마디에 맺혔던 마음이 풀린다. 오랫동안 묵은 감정이 풀리고 마음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남하늘은 고백한다. '나는 너를 좋아해.'

나도 너 때문에 버티고 있어
 
 닥터 슬럼프

닥터 슬럼프 ⓒ jtbc

 
슬럼프에 빠진다는 건 어떤 걸까? 자기 자신이 경주해왔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혹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하여 더는 애써볼 여력이 없었을 때가 아닐까. 그런데 '슬럼프'라는 용어를 쓸 때 꼭 함께 하는 동사가 '빠진다'이다. 어디에 빠진다는 걸까. 어쩌면 내가 파놓은 삶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게 아닐까.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나를 더 어렵게 만드는 건 바로 세상에 그런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 아닐까. 난 이렇게 힘든데, 세상 사람들은 다 씩씩하게 잘 사는 것 같고. 그래서 난 더 내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만다. 
 
<닥터 슬럼프>에서 슬럼프에 빠진 남하늘과 여정우에게는 다행히도 서로가 있었다. '우울증'에 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남하늘은 여정우를 걱정해주느라 자신의 우울증은 뒷전이다. 재판을 앞둔 여정우를 돕기 위해 논문을 읽느라 밤을 세운다. 그리고 그걸 들고 재판정으로 달려간다. 

여정우라고 다르지 않는다. 민경민 선배가 말한다. 니가 웃으면 안된다고. 그가 날린 돈에, 그가 잃은 명성에,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지금 여유롭게 웃을 때가 아니라는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남하늘을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심지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삐졌다가 웃었다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녀와의 만남이 있으면 가지고 있는 옷을 몽땅 꺼내 입어보며 설레인다.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닌데. 

니가 좋다는 남하늘에 말에, 여정우는 말한다. 나도 너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닥터 슬럼프>의 매력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아픔과 고통을 겪는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그들을 자신의 아픔 안에 가두어 두는 대신에 '사랑'을 앞세워 서로의 아픔을 헤아리며 그를 통해 자신의 어려움을 씩씩하게 극복해나가는 두 젊은이의 이야기라는 데 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데, 두 사람에게는 남하늘과 여정우라는 든든한 '튜브'가 던져진 것이다. 덕분에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앉아 정신과 약을 먹는 '동지'가 되었다. 

로버트 그린은 그의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살아가며 겪는 많은 문제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우울증에 걸린 여자와, 모든 걸 잃고 PTSD에 걸린 남자가 무슨 사랑이냐고 하지만, 그래서 남하늘도, 여정우도 서로를 좋아한다 말하고, 너 때문에 버틴다 하면서도 우리가 지금은 '사랑'을 할 때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선다. 하지만 말뿐, 이미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 두 사람은, 자신의 병도 잊을 만큼 서로에게 몰두해있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내 몫이고, 내가 해결해야 할 미션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 힘듦을 잊고 미소가 지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모쏠'이면서도 솔직하고 당당한 남하늘과, 세상이 알아주는 인플루언서였으면서도 하염없이 엉성한 여정우의 솔직함이 그래서 보는 이에게 조차 위로가 된다.
닥터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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