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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생존자'. 정신건강의학과 근무를 처음 하게 된 간호사 다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통해서 처음 들어본 말이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자살 생존자는 자살을 하려다 실패하고 살아남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자살로 잃은 후에 남겨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재난이나 참혹한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두고 '생존자'라 부른다. 자살로 친구나 가족을 잃은 자살 유가족들을 전문가들이 자살 생존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살 유가족들의 심리적인 고통이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 책 <슬픔은 발효중> 130쪽
 
충격적인 정의였다. 나는 감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어쩌면 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에게는 당연스럽게 안타까움이라는 이름으로 온기를 발산했지만, 그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는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책 <슬픔은 발효중>은 자살 유가족의 이야기다. 아니, '자살 생존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어머니와 오빠를 자살로 상실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서있는 맥락 위에서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슬픔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 

이 책에 담긴 글은 절절하다. 쓰인 글들보다, 이 글이 쓰이기까지의 자간과 행간에 서려있는 속사정은 가히 처절하다. 선명한 유교적 문화권의 집안 분위기와 기독교 문화권이 합쳐지만 저항하기조차 어려운 자연스러운 폭력이 발생된다.

거기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 물론 모든 기독교 문화권에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 기독교 문화권에서 슬픔은 얼마나 감춰져야 하는 일인지, 그러다보면 부패에 도달하는 것이 순서인 듯 보인다. 은유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자를 약자'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자살 생존자들은 약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는 부패가 아니라 '발효'에 착륙한 슬픔을 말한다. 이것은 눈물 나게 다행인 일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착륙한 그곳으로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도 착륙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엄마와 오빠를 자살로 잃은 내 슬픔은 현재도 발효중이다.
발효는 인간에게 좋은 면을 주는 미생물 작용이므로
비슷한 과정을 겪는 부패와는 구분된다.
산소부족이라는 결핍을 통해 젖산이 발효되는 것 처럼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위로받지 못했던 
슬픔이 이로운 효소로 발효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깊은 맛을 내는 김치나 된장처럼,
내 슬픔이 깊이 숙성되어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책 <슬픔은 발효중, 59p>
 
자살 생존자들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죄악시하는 사회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없는 듯 살아와야 했기에 이 사회는, 우리는 자살 생존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그 방법 자체를 모른다. 여전히 자살 예방에 대한 목소리만 메아리칠 뿐이다. 

이 책은 슬픔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이들에게,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살리는 힘'이 있는 책이다. 이 영역은 우리 사회에서 수면 위로 끌어올려 더 적극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부디 그 일을 하는 데 있어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슬픔은 발효중>
 <슬픔은 발효중>
ⓒ 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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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발효중 - 엄마와 오빠를 자살로 상실한 자살유가족이 써 내려가고 있는 치유와 성장의 여정

박경임 (지은이), 훈훈(2023)


태그:#자살, #자살유가족, #자살생존자, #슬픔은발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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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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