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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대학원에 입학했다. 남편의 나이는 올해 50살이고, 우리에게는 아이가 셋 있다. 남편이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어 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지만 이런저런 사정들로 항상 뒤로 미뤄야 했다.

남편은 서른 살 즈음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호주로 떠났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어학원을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서핑을 배우기도 했다. 남편의 삶에 반짝이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1년이 지나 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기 직전, 그 아름다운 일상에 방해꾼 하나가 찾아왔다.

남편과 초등학교 동창으로 친하게 지내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갑자기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 시간이 많아졌다며 호주로 놀러 왔다. 그 여자는 전에 알던 모습과 다른 남편의 반짝임을 보았다. 남편과 그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 남편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괘씸한 여자는 바로 나다.

그때 나는 남편이 공부를 하고 싶어 호주를 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의 생활이 재미없었거나, 호주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갔던 것이지 대학원을 꼭 가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다.

남편은 한국에 돌아와 나와 결혼했고, 그로써 대학원 진학은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마음속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나 보다. 남편이 몇 번 대학원 진학을 이야기했지만, 우리한테는 아이가 하나, 둘, 셋이 됐고 우리 앞에는 남편의 대학원 진학보다 급한 일들이 늘 쌓여 있었다. 나는 남편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우리 형편에 지나친 허세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 개발자였던 남편이 관리자가 되고, 몇 해 전 법인을 만들어 대표가 됐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세미나를 다니며 공부를 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책을 쓰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남편이 늘 바쁜 덕분에 육아와 살림은 모두 내 차지가 됐는데, 나한테는 그게 불만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남편이 20년을 한결같이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남편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 

올해는 첫째가 고3, 둘째가 고1이 됐다. 사교육비 지출이 많아 경제적으로 남편이 대학원을 진학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시기이다. 그럼에도 남편이 대학원 면접을 보겠다고 하는 걸 반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공부에 큰 뜻이 없는 아이들보다 남편을 먼저 공부시켜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이들보다 더 절실히 공부를 하고 싶은 건 남편이니까. 어쩌면 우리 아이들도 남편처럼 정말 공부하고 싶어 할 때 도움을 줘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입학식 후 강의실, 남편보다 많이 젊은 동기들
▲ 입학 입학식 후 강의실, 남편보다 많이 젊은 동기들
ⓒ 윤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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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군데 대학원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고 좋아하던 남편은 막상 천만 원이 넘는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 고민했다.

"휴, 더럽게 비싸네.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아니, 지금이 가장 좋은 때야. 돈은 어떻게 되겠지."


내가 남편한테 이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한건, 기다리고 미룬다고 해서 적당한 시기가 오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노후자금으로 저축해 둔 얼마 안 되는 돈을 깨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자가 별로 비싸지 않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보내줄 걸 그랬다. 하지만 남편한테도 말했듯이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믿는다.

입학식 전날, 남편이 염색약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나 염색 좀 해줘. 교수님보다 늙어 보이면 안 되잖아."

남편은 머리카락 절반이 흰머리지만 한 번도 염색을 하지 않았는데, 젊은 친구들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아빠, 염색하니까 30대 같아."

갑자기 너무 까매진 머리가 어색하다고 하는 남편에게 딸이 웃으면서 말했다. 남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편은 수요일 저녁과 토요일 온종일 수업을 들으러 간다. 지난 토요일에 개강파티를 한다고 술을 한 잔 하고 들어왔다.

"자기야, 친구들이랑 나이 차이 많이 나?"
"보통 30대인 것 같은데, 나랑 띠동갑이 있어. 한 바퀴 아니고 두 바퀴."
"와, 젊은 친구들이랑 놀아서 좋겠다. 이제부터 학생이라고 불러줄까? 어이, 학생!"


다음 날은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며 하루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학생, 좀 쉬었다 해."

학생이라고 불러서 그런지 남편이 점점 젊어진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가는 날이 많아졌고, 뱃살을 뺀다면서 야식과 탄수화물을 줄이는 등 식단 조절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분명 피곤할 텐데 남편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이십 년 전 호주에서 만난, 반짝이던 남편의 모습은 그가 젊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에서는 빛이 난다. 50살 남편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태그:#남편, #대학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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