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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노조 박물관'에서
 '자유노조 박물관'에서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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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폴란드에 갔다. '인문연구원 동고송'은 해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인문 기행을 떠난다. 필자는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다.

눈의 나라, 설원의 폴란드에 대한 동심을 품고, 나는 폴란드 북부 해안 도시 그단스크(Gdansk)에 내렸다. 가이드는 폴란드를 찾은 우리들을 신기하게 여겼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폴란드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폴란드 한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열흘을 투자하는 우리를 보면서 한국인답지 않다는 말을 뱉었다.

우리가 그단스크를 제1번 방문지로 선정한 것은 이곳에 설립된 '자유노조 박물관' 때문이었다. '자유노조 박물관'은 폴란드의 민주화를 추동한 그단스크 조선소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됐다. 1995년 그단스크 시와 유럽연대센터(European Solidarity Center)가 힘을 합해 만든 합작품이란다. 폴란드인은 자국의 민주화운동이 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방아쇠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냉전체제를 허문 세계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웅장했다. 박물관 5층 건물이 검붉은 철판으로 제조된 대형 선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단스크 시민들이 조선소에 품은 자부심이 물씬 풍겨왔다. 더불어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자유와 민주를 위해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린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예우를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도시 어디를 가나 벽에 'Solidarity(솔리대리티, 연대)'라는 구호가 쓰인 것을 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솔리대리티는 '연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추구했던 '자유, 평등, 박애'처럼 폴란드 민주화운동이 지향하는 정신적 의미의 어떤 것, '하나 됨'의 뜻을 내포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5층 건물이 검붉은 철판으로 제조된 대형 선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박물관 5층 건물이 검붉은 철판으로 제조된 대형 선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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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쓴 노란 작업모, 작업화 등이 이곳 폴란드 ‘자유노조 박물관’에 역력히 보존돼 있음을 보고 넋을 잃었다.
 노동자가 쓴 노란 작업모, 작업화 등이 이곳 폴란드 ‘자유노조 박물관’에 역력히 보존돼 있음을 보고 넋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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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나라

1980년 7월 폴란드에서 일어난 '자유노조운동'은 1980년 '서울의 봄'과 이어지는 '오월광주항쟁'과 너무나 유사해 박물관에 들어간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날 노동운동을 했던 나는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투쟁과 아주 유사한 것들인, 노동자가 쓴 노란 작업모, 작업화 등이 이곳 폴란드 '자유노조 박물관'에 역력히 보존돼 있음을 보고 넋을 잃었다.

폴란드는 한국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 생각할수록 흥미로웠다. 먼저 폴란드는 강대국의 간섭에 의해 주권을 잃었다는 점에서 우리처럼 약소국의 슬픔을 지닌 나라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에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다. 한국 축구팀이 일본에게 만큼은 져서는 안 되듯이, 폴란드의 축구팀은 러시아에 지면 안 된다. 독일의 경우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적대감은 크게 완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아직까지 폴란드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이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알고 보니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이 과거 폴란드의 영토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주조한 공산당이 폴란드를 통치했는데,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인의 숨통을 조인 독재자들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통치의 잔혹함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와 같은지. 힘없는 민초들을 위압하는 관료적 속성도 같았다.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불법으로 연행, 체포하고, 구속하고 죽이고...

폴란드에서도 1970년에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그때 분신했는데, 폴란드 공산당은 시위 노동자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때 총탄이 관통한 노동자의 작업복을 박물관은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 사망한 노동자를 기념하는 높이 30미터의 기념탑이 박물관 입구에 서 있었다. 폴란드 노동자들은 이후 줄기차게 기념탑을 세워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여,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겁니다.
조선소의 깃발에 걸린 검은 리본이여
빵과 자유를 위해
조국을 위해
노동자 야네크는 쓰러졌다오"
 
기념탑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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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도 노동자들은 '기념탑을 건립하라'는 요구를 제기했다. 그 노동자의 이름이 '레흐 바웬사'였다. 1970년 '12월 사건'을 목격한 레흐 바웬사는 민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을 결심했다. 1976년, 바웬사는 '죽은 노동자를 위한 기념탑'을 세우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1980년대 간간히 신문에 보도됐던 바웬사는 우리에겐 '한 명의 노동조합운동 지도자'였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게 있었다. 폴란드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노동운동을 이끈 바웬사는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주역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김대중·김영삼은 직업정치인이었지만, 폴란드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바웬사는 노동자였다. 이 점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1980년 오월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 대항쟁'에 이르는 민주화운동이 먼저 있었고, 이후 열린 민주화 공간에서 '1987-1988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이 전개됐다. 반면, 폴란드에서는 1980년 7월에서 1981년 12월까지 자유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한 파업운동이 먼저 있었고, 이후 자유노동조합운동을 지지하는 연대의 과정에서 농민과 학생, 지식인 집단이 조직됐다. 노동운동의 주도성, 이 점이 달랐다.

연대의 나라

폴란드인들은 90%가 가톨릭 신자이고, 신앙의 힘으로 수난을 이겨낸 민족이었다. 1985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고향을 방문하면서 폴란드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수백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는 공공연하게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강론을 폈다.
 
"저는 외칩니다.
폴란드의 아들이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고 불리우는 저는 외칩니다.
이 밀레니엄의 어두운 곳에서 저는 외칩니다.
펜테코스트 철야 집회에서 저는 외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소서.
내려와 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이 나라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1980년 '그단스크의 여름'으로 들어가 보자.

1980년 8월 14일 해고자 안나의 복직을 촉구하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 안나의 해고 소식 앞에서 분노했다. 기사들은 작업을 중지하였고 시위에 돌입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안나를 복직하라. 임금을 인상하라. 1970년 12월 죽은 노동자의 기념물을 설립하라."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유노조(free trade unions)를 인정하라." 안나의 복직은 쉽게 수락됐으나 자유노조를 놓고 경영진과 실랑이를 벌였다. 힘든 협상이 개시됐다. 이 무렵 그단스크 인근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합류했다.
 
총알이 관통한 작업복
 총알이 관통한 작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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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연대 파업이 물결처럼 퍼져갔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자유노조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1980년 8월 20일, 지식인들이 정부에게 성명서를 제출했다. 가능한 빨리 노동자 대표들과 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파업 중인 350여 공장의 노동자들이 '공장간 연대 파업위원회'를 결성했다. 8월 말엔 참여 노동자들이 700여 공장으로 늘어났다.

이때 대학생들이 연대투쟁에 합류했다. 1980년 9월 18일, 대학생들의 전국 집회가 바르샤바 대학에서 열렸다. 학생들은 학내 민주화를 요구했고, 정치적 자유와 인권 신장을 요청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그단스크에 집중됐다.

8월 30일, '공장간 연대 파업위원회'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요구를 정부에 제시했다. 정부는 굴복했다. 독립 노조를 인정하게 됐다. 8월 31일, 바웬사는 파업을 중지하는 협상에 서명했다. 조선소 정문에 다음과 같은 소식이 고지됐다. "드디어 우리는 독립적인 자율적인 노동조합을 갖게 됐다. 이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1980년 '그단스크의 여름'은 우리의 '서울의 봄'처럼 군대의 탱크에 짓밟혔다. 시기는 좀 달랐다. 폴란드 공산당은 1981년 12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연대'를 불법화했고, 레흐 바웬사를 검거했다.

여러 면에서 폴란드는 한국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폴란드는 한국보다 경제력은 약하지만, 독일과 비슷한 복지국가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완벽한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무상의료는 당연하다. 퇴직 후 전 국민이 평균 월 150만 원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각자도생의 나라 한국과 달리 폴란드는 연대의 나라였다.
 
각자도생의 나라 한국과 달리 폴란드는 연대의 나라였다.
 각자도생의 나라 한국과 달리 폴란드는 연대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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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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