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 범죄나 사회적 윤리 같은 소재를 사용해 어두운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장르를 '누아르'라고 부른다. 흔히 국내에서는 '누아르'라고 하면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의 액션영화로 생각하는 관객이 적지 않지만 누아르를 '어두운 분위기의 액션영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액션 장르와는 거리가 있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도 매우 훌륭한 누아르 영화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누아르가 '어두운 액션영화'로 인식된 것은 '홍콩 누아르의 대가' 오우삼 감독의 탓이 크다. 오우삼 감독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시리즈로 대표되는 총기액션이 중심이 되는 어두운 액션 누아르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우삼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자란 그 시대의 청소년들은 '누아르는 곧 어두운 액션영화'라는 인식을 가진 채 어른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에 액션 장면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거나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 '누아르'로 인정 받지 못하곤 했다. 하지만 1990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어두운 거리가 익숙한 남자주인공과 부잣집에 사는 여자주인공의 사랑을 다루고 있음에도 누아르의 색깔을 짙게 풍기고 있다. 바로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연을 맡은 고 진목승 감독의 '멜로 누아르' <천장지구>다.
 
 <천장지구>는 극장상영 후 비디오 대여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천장지구>는 극장상영 후 비디오 대여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 아성영화(주)

 
진지한 연기와 코믹 연기를 오가던 배우

국내에서는 코미디 배우로 널리 알려진 고 오맹달은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홍콩으로 이주해 1973년 TVB 방송국의 연예인 훈련반 3기로 입사했다. 당시 오맹달의 동기 중에는 '영원한 따거' 주윤발도 있었다. 1974년에 데뷔한 오맹달은 1979년 드라마 <초류향전기>를 통해 스타로 도약했지만 1980년대 술과 도박에 빠지면서 많은 빚에 시달려 '중국의 마피아'로 불리는 삼합회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위기에 빠진 오맹달은 친한 친구였던 주윤발에게 금전적 도움을 청했지만 주윤발은 "스스로 극복하라"며 오맹달의 부탁을 거절했다. 결국 오맹달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천장지구>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포숙 역을 따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천장지구>의 제작자 두기봉 감독과 연출을 맡은 진목승 감독은 오맹달에 대한 나쁜 소문 때문에 캐스팅을 망설였는데 주윤발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그에게 포숙 역을 맡겼다고 한다.

<천장지구>에서의 열연를 통해 1991년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오맹달은 1990년대 주성치와 콤비를 이루며 코미디 배우로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실제로 오맹달과 주성치는 1990년 <도성>을 시작으로 2001년 <소림축구>까지 10여 년의 시간 동안 무려 2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소림축구> 이후 주성치와 자연스럽게 멀어진 오맹달은 2000년대 이후 출연하는 작품의 수도 크게 줄었다. 오맹달은 2008년 주걸륜이 주연을 맡은 <쿵푸 덩크>에서 마스터 우를 연기했고 2012년에는 증지위가 연출하고 한국배우 유오성이 출연한 < 7인의 암살단 >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맹달은 2014년 지병인 심부전이 악화돼 주성치가 연출한 영화 <미인어>의 캐스팅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건강문제로 활동이 크게 위축된 오맹달은 2019년에 출연한 SF영화 <유랑지구>가 유작이 되고 말았다. 2021년 간암이 악화된 오맹달은 그 해 2월 향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맹달의 빈소에는 그와 함께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보냈던 많은 스타들이 화환을 보냈고 오맹달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주성치를 비롯해 <천장지구>에 함께 출연했던 유덕화 등은 직접 빈소를 방문해 오맹달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라이징 스타 유덕화와 신인 오천련의 애절한 멜로
 
 아화와 죠죠의 결혼식 장면은 추후 여러 매체에서 오마주 및 패러디될 정도로 많은 화제가 됐다.

아화와 죠죠의 결혼식 장면은 추후 여러 매체에서 오마주 및 패러디될 정도로 많은 화제가 됐다. ⓒ 아성영화(주)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 영화를 수입하면서 국내 정서에 맞게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천장지구> 역시 이에 해당하는데 <천장지구>의 원제는 '하늘에도 정이 있다면'이라는 뜻을 가진 <천약유정>이다. 하지만 국내로 수입되면서 <천약유정>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뜻을 가진 <천장지구>로 제목이 바뀌었다.

<천장지구>가 국내에 개봉했던 1990년 가을, 유덕화는 <열혈남아>와 <지존무상>, <도신:정전자>에 출연하면서 주윤발과 장국영을 잇는 홍콩의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총기액션도 없고 남자들의 우정이 주제도 아니었던 <천장지구>는 서울 관객 9만9000명으로 큰 흥행을 하진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렇게 조용히 묻히는 듯 했던 <천장지구>는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많은 인기를 얻으며 재조명됐다.

실제로 유덕화는 <천장지구>에서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지는 '청청패션'을 고수하는 홍콩의 젊은 반항아를 잘 표현했고 이후 국내에서도 청청패션이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멀쩡하던 청년이 가스통으로 뒤통수를 맞고 갑자기 코피를 줄줄 흘리며 서서히 죽어간다는 <천장지구>의 설정은 다소 억지스럽다. 하지만 아화(유덕화 분)의 코피는 죠죠(오천련 분)와의 가슴 아픈 사랑을 표현하는 장치로 쓰이며 관객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죠죠가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화는 떠나려는 죠죠를 오토바이에 태워 교회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쇼윈도를 깨고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훔쳐 입은 아화와 죠죠는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데 이 때 아화가 흘리는 코피가 죠죠의 손등에 떨어지는 장면이 영화의 슬픔을 극대화했다. 결혼식 장면에서 흐르는 홍콩의 전설적인 록밴드 BEYOND가 부른 OST <단잠적온유> 역시 관객들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줬다.

2000년대 초·중반 태국의 많은 액션영화들이 <옹박>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봉했던 것처럼 1990년대에도 홍콩의 많은 멜로영화들이 <천장지구>라는 이름을 걸고 개봉했다. 물론 곽부성과 오천련이 출연하고 진목승 감독이 연출한 공식속편 <천약유정2 – 천장지구> 같은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1996년 유덕화, 관지림 주연의 < 1/2 차동상 > 같은 영화가 1999년 국내에서 <천장지구3 – 천장지구 완결>이라는 괴이한 제목으로 개봉하기도 했다.

왕조현을 위협했던 무서운 신인배우
 
 오천련은 <천장지구>가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청순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오천련은 <천장지구>가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청순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 아성영화(주)

 
유덕화는 <천장지구> 출연 당시 국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배우였지만 대만출신 배우 오천련은 <천장지구>가 데뷔 첫 작품이었을 정도로 완전한 신인이었다. 하지만 오천련은 청초한 매력을 앞세워 죠죠 역을 무난하게 소화하면서 홍콩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비련의 여주인공답게 영화 내내 표정이 우울하지만 아화의 생일을 축하해 줄 때는 소녀 같은 매력이 드러나기도 했다.

오천련은 <천장지구> 이후 홍콩과 대만을 오가며 활동했고 <천장지구>의 공식속편 <천장지구2>는 물론이고 <95 천장지구 – 신변연인>,<묘가 천장지구>처럼 '제목만 <천장지구>'인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1995년에는 거장 이안 감독의 초기작 <음식남녀>에서 요리사 집안의 둘째 딸을 연기하기도 했다. 2007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배우 생활을 접은 오천련은 현재 내조와 육아에 전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지구1,2>를 연출한 고 진목승 감독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오우삼, 두기봉 감독에 가려졌지만 액션과 코미디, 누아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며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왔다. 1998년 <성룡의 CIA>를 시작으로 <뉴 폴리스 스토리>,<BB프로젝트> 등 성룡과도 여러 작품을 함께 한 진목승 감독은 지난 2020년 비인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목승 감독은 2022년 유작 <레이징 파이어>로 홍콩 금상장 감독상을 사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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