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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은퇴를 한 지 1년 2개월이 지났다. 직장생활 전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새로운 삶, 그야말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부부 관계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으로, 가장으로서 나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내가 가족을 위해 가정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전업주부로서 당연한 역할이라고 여겼다. 30여 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서 은퇴 이전까지는 이런 삶의 연속이었다.

퇴직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생활이 끝났으니 부부 관계도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고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과거에 가졌던 부부의 역할 분담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어야만 했다. 아내의 역할이라면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집안일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내가 가정을 위해 어떻게 살림을 꾸려왔는지 세세하게 지켜보고 같이 하면서 1년 2개월을 보냈다.

우선 지난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집안일들을 묵묵히 감당하며 가정을 이끌어 온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언뜻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집안일들이 만만찮음을 실감하면서 아내의 수고를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살림 전문가인 아내와 함께하는 쇼핑 즐거움
 
필자가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필자가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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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내가 시장을 보러 갈 때도 자주 동행을 한다. 아내는 진열된 상품의 가격과 유통기한, 영양 성분 같은 정보를 일일이 확인하고 따져 본 다음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사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처럼 아내가 상품 정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면서 시장을 보는 게 지루하고 따분하여 시장 보러 같이 다니는 일이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다. 같이 가더라도 그저 빨리빨리 시장 보기를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물건을 살펴보고 따져 보면서 고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언젠가 아내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물건이 거기서 거기고, 다 비슷비슷한데 대충 고르면 되지. 뭘 그렇게 살펴보고 고르길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야?"
"물건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여도 가격과 품질에 차이가 나잖아. 아무거나 함부로 살 수는 없는 거지. 가능하면 가성비가 좋은 걸 골라야지."


아내의 말이 맞긴 맞지만, 은퇴 전에는 가격이나 품질에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일일이 따져 보는 건 괜한 시간 낭비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은퇴 후에 아내의 시장 보는 걸 지켜보면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온 것은 아내의 수고 덕분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허투루 사는 법이 없다. 물건의 종류에 따라 구매하러 가는 시장도 다르다. 일반 생활용품은 대형 마트를 이용하고, 생선 같은 먹을거리는 재래시장을 주로 이용한다. 생활용품을 살 때는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사려고 할인 정보를 활용하고, 싸고 신선한 먹거리를 파는 재래시장이 어딘지도 훤히 꿰뚫고 있다.
 
아내가 1997년에 쓴 가계부의 내용과 지금까지 쓴 가계부 중 일부의 표지이다.
 아내가 1997년에 쓴 가계부의 내용과 지금까지 쓴 가계부 중 일부의 표지이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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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인 내가 인정하는 살림 전문가이다.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습관처럼 매일매일의 가정 경제를 꼼꼼하게 가계부에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30여 년을 한결같이 저렇게 가계부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의 모습이 대단하다. 이제 나는 아내가 시장 보는 것을 재촉하지도 않고, 지루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 부부는 가성비 좋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상품 정보를 확인하면서, 쇼핑하는 즐거움을 함께한다.

생활력 강한 아내, 자신을 위한 삶 살았으면
 
아내가 텃밭에서 쪽파를 다듬고 있다.
 아내가 텃밭에서 쪽파를 다듬고 있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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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양가 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자식들도 제 갈 길을 찾아 독립해서 나갔다. 그동안 모셔야 했던 부모님, 돌봐야 했던 자녀가 떠난 집에는 우리 부부만 남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생활력 강한 아내는 오전 시간을 활용하여 아르바이트도 한다.

나도 텃밭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 한가하지는 않지만, 가끔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오후에 바쁜 볼일이 있으면 내가 아내의 점심을 챙겨서 줄 때도 있다. 집안 청소를 하고,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나에게도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역할이 바뀌어 아내는 바깥에서 일을 하고 이젠 내가 집안일 하는 경우도 생기다 보니, 아내가 과거에 부모님께 신경 쓰고 아들딸을 키우면서 살림살이한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아내는 가족들을 위해 가정 살림을 잘 꾸리고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소비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남은 인생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면 좋으련만, 오랜 생활 방식을 좀처럼 바꾸기가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아내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으면 한다. 나는 요즘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고 아내가 하는 일이나 활동을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지지해 준다. 앞으로도 지난 세월에 미처 신경을 써 주지 못한 아쉬움까지 더해서 아내의 삶에 좀 더 많은 신경을 집중해 보려고 한다. 인생 2막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아내의삶, #부부의삶, #살림전문가, #쇼핑즐거움, #가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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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글로 표현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살맛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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