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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봉

넓은 바다 큰 물결에

우뚝 서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네

자미(紫薇)에 있는 임금의 뜻 바루고자 하면

먼저 정도(正道)를 찾아 치격(恥格)해야 하리

                                      - 고산 윤선도 - 


1637년 이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온 나라가 어려울 때 판옥선(板屋船) 한척이 제주를 향해 남해의 창파를 가르고 있었다. 이 배에는 세파에 지친 한 선비가 타고 있었으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였다.

고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솔을 이끌고 봉림대군을 구하고자 강화도(江華島)로 향했으나 오늘날의 안면도(安眠島)부근에 다다라 강화도가 함락되고,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고산은 남은 생을 은둔하기로 결심하고 제주로 향하던 중 겨울 파도가 심하게 일자 보길도의 대풍구미(對風口尾)에 배를 정박하였다. 

길지의 섬 보길도

대풍구미에 정박한 고산 일행은 황원포(황원포)로 다시 배를 몰아 뭍에 오르고 산세를 둘러보니 굳이 제주까지 갈 필요가 없는 길지의 섬 보길도(甫吉島)였다.

풍수의 대가였던 고산은 몇일을 머물며 섬의 곳곳을 살피고 마지막에 하인들을 시켜 장대를 들고서 산의 봉우리에 오르거든 붉은기(紅期)를 장대에 묶어세우라 하였다. 적자봉(赤紫峰. 435m)을 주산으로 한 부용동(芙蓉洞)은 이렇게 생겨났다. 적자봉은 상록활엽수림이 계곡과 능선을 덮어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부드럽고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한다. 그렇지만 50년 전만 하더라도 적자봉은 사유지 일부와 8부 능선을 제외하고는 민둥산이었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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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민둥산에서 벌목되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가 있으니 회양목(淮陽木)이다. 다만 적자봉의 회양목도 손목 굶기의 나무들은 모두 잘려 주로 목포(木浦)의 중간상인에게 도장과 장기알의 재료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적자봉의 8부 능선부터 정상까지 넓은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회양목은 수령이 50년에서 100년 정도 된 나무들만 빽빽한 원시림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그러나 100년을 자란 나무라고 해도 워낙에 척박한 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회양목은 어린나무로 흉고직경이 두텁지 않을 뿐 더러 어른의 팔목만큼하다. 수고도 그리 높지 않아 일반인들은 적자봉에 오르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적자봉에 회양목 군락지가 있는지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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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자연에서 자라는 회양목의 경우 목질이 치밀하고 단단한 만큼 생장 시간도 굉장히 길고 성장이 느리다 그러다 보니 회양목의 최대 높이인 5m를 자라는데 평균 2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더디자란 회양목을 노래한 대가가 있으니 소동파다. 북송시대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던 소동파는 자신의 시 퇴포(退圃)에서 

"園中草木春無數″ 원중초목춘풍수 (정원의 풀과 나무는 봄이 오면 그 수를 알 수 없건만), 

″只有黃楊厄閏年″ 지유황양액윤년(오직 황양목(회양목)은 윤년에 재앙을 당한다네.)"

인쇄문화 발전시킨 회양목

회양목의 더디 자람을 말했다. 

회양목은 보길도에서 '깡깡이나무' 또는 '도장나무'로 불린다, 나무가 단단해 도장을 파거나 장기알을 만드는데 최고의 재료로 알려져 있다. 또한 최고급 빗이나 조선시대에는 호패의 재료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왕조시대에 회양목으로 글자를 파서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만큼 회양목은 나무질이 곱고 치밀하여 나무활자를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재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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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하(83. 보길면 부용리, 사진 좌측)씨가 말했다. 

"여기서 평생을 살었어요. 그란디 저그 마당에 회양목이 내 삶을 이야기 해 주요, 회양목은 잘 안 커요. 내가 지금 야든이 넘었는디 우리아부지가 산에 나무 하로 갈 때 따라가서 적자봉 정상 부근에 누룩바위라고 큰 바위가 있어요.

거그서 캐온 나무가 저 나무인디 그때 아부지 말씀이 한 40~50년은 컷을 것이라고 그랬어요, 내가 한 70년을 키웠으니 저 나무도 100년이 넘었어요, 내가 캐서 가져올 때 굵기가 손가락 같이 가늘었어요, 오랫동안 공들여서 키우니까 지금은 수형도 좋고 남들이 나무가 멋지다고 팔라고 그란디 안 폴고 있어요.

적자봉은 8부 능선부터 정상까지 회양목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요. 회양목은 아조 척박하고 땅이 거친곳에서 자생해요, 그래서 더디 크고 화목으로서 가치가 떨어지니 살아 남었는디 옛날에 화목연료를 땔때는 적자봉에 나무가 남어나질 안했어요, 회양목이 살아남은 것은 화목으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살아 남었어요. 저 나무는 분재를 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나무인디 가지를 휘어서 3년을 둬도 끈을 풀면 가지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버려요, 그래서 가지를 휘지는 못하고 여기저기 잘라서 분재로 만드는데 요즘은 분재를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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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심(80. 보길면 부용리, 사진 우측)씨의 말이다. 

"나는 스무살 되던 해 정월에 당사도(唐寺島)서 여그로 시집을 왔는디 그때 어른들이 또가리(똬리의 전라도 사투리)하고 몸빼(일상생활의 현대화가 이루어지기 전 여성들이 일할 때 입는 일반적인 바지로 입고 벗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를 꼭 해가라고 그래, 그란디 나는 안 해갔고 왔어, 왜근고니 하먼 내가 시집올때만 해도 당사도서 한 인물 했거등, 그란디 부용리로 시집가먼 해변 산중이라 날마다 적자봉서 땔나무를 해다 노화에다가 폴아야 된다고 그래,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또가리 하고 몸빼는 안 해 왔는디 나무는 날마다 해 날랐어.       

그때 적자봉이 어찌께나 나무를 하든지 민둥산 이었어 개인 산에서는 땔나무를 못해 그랑께 동내산에서 나무를 한디 산꼭대기에 가먼 간장주름한 회양목이 징하게 많애, 또 산 중턱 곳곳에 회양목 군락지가 있었는디 그란디 불쏘시게가 안된께 그것은 안비어 와.

내가 시집와서 본께 그때는 집집마다 회양목을 케다가 화단에다가 심궈놨어, 둥그랗게 분재를 많이 맹글었어 또 여그 초등학교에서도 화단을 가꾼다고 회양목을 가져오라고 그래, 우리 애기들도 학교에 나무를 내야된다고 산에가서 회양목을 모다 케오고 그랬어.″   


적자봉에서 굴취하여 70년을 키웠다는 윤성하씨의 회양목이 잘 자랐으면 하는 소원을 빌며 펜을 놓는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완도, #적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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