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계는 안팎곱사등이다.

<스파이더맨 3>으로 시작된 미국영화의 맹폭이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의 '대규모 동시개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관들은 국내 1800개의 화면 가운데 860개를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에 할애했고, 영화는 이틀 만에 10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밀양>은 269개의 화면을 점유하면서 지난 26일까지 27만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화면수와 관객을 산술평균하면 양자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셈이다.

이런 추세는 올해 개봉된 한국영화 가운데 300만 안팎의 관객이 관람한 <그놈 목소리>와 <1번가의 기적> 정도가 고작이다. 할리우드의 공세는 줄줄이 예정되어 있고, 스크린쿼터는 73일로 못박혀있다.

전복적인 미학을 선보이며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슈퍼맨 콤플렉스'를 시원스레 날려버린 <슈렉 3>이 6월 6일 개봉예정이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해리가 선보일 영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7월 12일 관객과 만날 것이다. 4월 30일, 5월 23일, 6월 6일, 7월 12일. 스크린쿼터마저 토막난 한국을 향한 할리우드의 침공은 치밀하게 기획되어 있다.

도도한 여인 신애, 상실의 끄트머리에 홀로 서다

ⓒ 파인하우스필름
전도연이 열연한 신애는 독특하다. 신애(信愛)라는 이름은 흔하고 흔하지만, 거기 담겨진 의미는 아름답다. '믿고 사랑하는' 혹은 '사랑을 믿는' 여인. <오아시스>에서 이창동은 '한공주'와 '홍장군'이란 이름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성격화-유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공주와 혁명가 홍경래의 14대손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장군.

세상에서 버림받고 불량한 인간 장군과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오아시스> 아니던가. 소설가 이창동은 이렇듯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아이러니와 뒤집어보는 미학을 선보여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불편한 영화 <오아시스>의 차고 넘치는 사랑의 폭발은 얼마나 싱싱했던가!

<밀양>의 신애는 낯설고 이질적이다. 남동생 민기가 말하듯 그녀는 죽은 남편에게서 이미 버림을 받은 터였다. 남편을 믿고 사랑하였으며, 남편의 사랑을 믿은 여인 신애가 배신의 상처를 지니고 귀환하는 밀양. 누구나 그렇듯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욕망이다. 그래서 신애의 밀양행에는 다소의 기대와 불안이 동행한다.

영화 <밀양>이 관객에게 던지는 예기치 못한 충격과 경악은 거의 언제나 신애를 향한다. 천형(天刑)처럼 신애가 그런 고통과 만나야 한다고 감독은 믿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애의 끝모를 상실의 반복을 목도한다.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잃어버리는 신애의 형상은 '사랑'과 '믿음'마저도 포기해야할 만큼 절박하다.

신애의 시댁식구, 특히 밀양의 시어머니가 보여주는 매정함과 야멸스러운 모습은 그녀의 절대고독과 절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고집스러운 친정아버지, 하루하루 분주하게 살아가는 동생, 친정어머니의 부재. 이런 정황과 속성이 그녀를 마지막 지점까지 몰고 간다. 약사 강 장로를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은 신애의 적막한 내면풍경 하나를 드러낸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 같은 여인 신애. 세상과 의사소통을 단절하고 고독의 극한지점에 정지해 있는 인간 신애. 절대자보다 인간의 권능과 자비를 앞세우는 자부심 넘치는 신애. 인간내면의 심연을 끝까지 탐사하면서 오만하게 하늘을 우러르다가 토악질하는 도도한 여인 신애. 과연 그녀에게 구원과 평안은 찾아올 것인가, 이창동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런 사랑도 사랑인가, 종찬의 고단한 행장

ⓒ 파인하우스필름
사십을 바라보는 노총각이자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는 시끄러운 인간. 세상사는 돈과 권력과 인간관계로 움직인다고 믿는 속물. 그래서 대한민국 관객에게 더욱 커다란 친밀감을 선사하는 인물 종찬. 신애에게 종찬은 한 마디로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 <밀양>은 '아닌 인간' 종찬을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신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시킨다.

사망신고서를 접수하러 동사무소에 가려는 신애를 끝까지 따르다가 종찬은 차에서 떠밀린다. 말 못할 상실로 괴로워하던 신애가 손가방에서 주민등록증을 찾으려다 내용물을 쏟아버린다. 그때 망연자실한 신애 곁을 지키는 유일한 인물 종찬. 그런 종찬의 모습은 병원에 실려 온 신애의 머리냄새를 맡으려 고개를 숙이는 장면에서도 차분하게 그려진다.

영화 <밀양>에서 종찬은 신애에게 매혹된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빼놓지 않으려는 의지의 인간이 종찬이다. 감독이 종찬을 신애 곁에 붙들어 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애를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신애의 삶은 온통 비극적이지만, 인생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며 끓여내는 섞어찌개 아닌가.

그런 삶의 교차지점에 종찬이 있다.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생과 사의 양극단이 교차하는 지점에 어울리는 인물이 종찬이다. 밀양에서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신애가 도움을 구하려 달려온 곳은 종찬의 수리공장이다. 하지만 그 시각 종찬은 노래방기기 앞에서 온몸으로 열창하고 있다. 극단적인 대비가 서늘하게 드러난 잘 만들어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종찬을 단순하고 일방적인 사랑에 목맨 노총각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서운할 듯하다. 속되지만 나름의 굳건한 처세 철학이 있는 그는 민기와 신애에게 밀양을 이렇게 소개한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세상 어디서나 사람 살아가는 이치는 똑같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나 나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신애를 향한 그의 마음은 마지막까지도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조금은 희망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창동은 이 지점에서 전혀 자상하지 않다.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고 짐작하라는 태도가 역력하다. 민기와 종찬이 밀양역 앞에서 '다음에 꼭 한 잔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 장면은 소설가 이창동의 복선이 깔려있는 대목이다.

이런저런 연줄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크지 않은 도시 밀양. 관심만 있다면 이웃집 젓가락 숫자까지 알 수 있는 사회관계. 하지만 그곳에도 건전한 투자를 빙자한 부동산투기가 일상화되어 있으며, 아이들은 소년범죄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티켓다방으로 표현되는 여성성의 노골적인 상업화는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무감각하게 다가온다.

<밀양>은 사랑의 상처와 상실, 고통이 넘실대는 달착지근한 연애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영화에는 2007년 시점에서 포착되는 한국사회의 다채로운 양상이 넘쳐난다.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의 추악한 면면이 도처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살해현장에서 누군가가 자조하듯 거칠게 내뱉는 대사가 오늘날 '밀양'과 한국사회의 면모를 대변한다.

"우리 밀양이 언제부터 이리 됐노!"

'밀양'의 의미는 영화 <밀양>의 영어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은밀한 햇빛(secret sunshine)의 도시 밀양! 하지만 한자로 보면 밀양(密陽)의 뜻은 그와 다르다. 햇빛 가득 넘치는 고을이란 뜻의 밀양. 영화 곳곳에서 햇빛이 넘쳐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밀양 초입에서 관객은 푸지게 일렁이는 따가운 여름햇살 한가운데 멈춰선 신애를 만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밀양의 충만한 햇빛이 드러난다. 미장원에서 자르다만 머리털을 신애가 손수 잘라낸다. 잘려나간 머리털은 무리지어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생뚱맞게 내던져진 허접 쓰레기들 옆에 자리하는 머리털을 내리비치는 밀양의 한가로운 햇살. 어쩌면 거기가 신애가 살아갈 새로운 삶의 출발점일지 모르겠다.

<밀양> 같은 영화가 더 나오길 바라며...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에서 이창동 감독은 영화감독보다 소설가의 감수성을 선보였다. <오아시스>에 이르러 비로소 그는 영화감독으로 관객과 만났다. 신작영화 <밀양>에서는 소설가 이창동과 영화감독 이창동이 화해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인물의 내면을 깊은 곳까지 추적하는 소설가와 그런 인물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감독의 화해.

<밀양>에서 이창동은 자극적인 장면이나 극적인 반전을 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객석에 강렬한 긴장을 선물하며, 관객은 도처에서 허를 찔린 표정이 역력하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인간의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이 불러오는 처절함에서 기인한다. 절망의 끝에서도 삶을 향한 실오라기를 붙들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

영화 <밀양>에는 짧고 가벼운 웃음과 찌르고 에는 아픔이 공존한다. 화려한 볼거리로 영화관을 점령한 할리우드 대작영화들과 승부해야 하는 한국영화의 이정표 하나를 세운 영화가 <밀양>이다. 세상과 소통하면서, 세상의 밝고 어두운 면면을 낱낱이 까발리고, 거기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사랑과 믿음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속속 나오기 바란다.
2007-05-28 10:44 ⓒ 2007 OhmyNews
밀양 신애 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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