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올림픽축구 D조 예선 한국과 카메룬의 경기가 펼쳐진 7일 친황다오 스포츠센터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축구 D조 예선 한국과 카메룬의 경기가 펼쳐진 7일 친황다오 스포츠센터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다. ⓒ 남소연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두고 있다. 북한, 사우디, 이란, UAE 등과 함께 '죽음의 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번 최종예선은 한국축구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을 가늠할 최대 고비다.

 

한국축구는 최근 몇 년간 각급 대표팀 성적이 계속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노메달을 시작으로, 2007년 U-17 대회와 U-20 월드컵, 2008 베이징올림픽 본선에서 연이어 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했다. 성인대표팀도 3차예선을 통과했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경기력으로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아야했다.

 

대표팀이 매너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최근 열린 유로 2008과 베이징올림픽에서 나타난 세계축구의 현주소는, 한국축구에도 많은 교훈을 남겼다. 2002년 4강신화 이후 과연 한국축구가 세계축구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남긴 장면이었다.

 

압박과 탈(脫) 압박

 

90년대 이후 세계축구의 추세는 단연 '압박'이었다. 강력한 프레싱과 조직적인 협력수비를 통해, 개인 능력이 뛰어난 선수를 차단하고 '공간을 장악'하는 전술이 보편적인 추세로 자리잡으며, 약팀이 강팀을 잡는 이변도 부쩍 늘었다. 압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현대 축구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기의 열세를 탄탄한 조직력과 체력으로 만회하며 4강신화를 열었던 2002 월드컵을 통해, 대한민국도 압박축구의 가치와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한국축구에서는 사실상 압박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압박의 기본이 되는 강인한 체력과 스피드가 더 이상 세계무대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며, 한국축구는 이제 약팀에게도 이변의 제물이 되기 일쑤였다. 대표팀은 후반 중반 이후 오버페이스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드러냈고, 상대의 밀집수비를 공략하지 못해 자주 빈공에 허덕여야 했다.

 

한국축구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세계축구의 흐름은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지난 유로 2008에서는 강팀과 약팀을 막론하고 '압박축구'의 완성도가 정점에 달한 반면, 한편으로는 탈(脫)압박을 위한 다양한 전술적 실험들이 속속 시도되고 있었다.

 

유로 2008에서 두드러진 키워드는 단연 '공수 포지션 파괴'와 '원터치 플레이'의 증가에 있다. 전방과 후방의 공수간격을 최소한으로 좁히는 콤팩트한 현대축구에서, 공격은 공격, 수비는 수비만 강조하는 전통적인 포지션 개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강호들은 좌우 윙포워드나 미드필더들이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는 '스위칭 플레이'를 통하여 상대 수비의 압박을 무력화 시켰다. 국내에서는 세트피스 외에는 금기시되어 있는 중앙 수비수들의 오버래핑이나 최전방 공격수들의 수비가담도 유럽에선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약속된 패턴하에서 따라 일정한 공수간격을 유지하며 펼치는 유기적인 협력 플레이는, 선수들의 창조성과 조직력의 균형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3차예선에서 해외언론에게 '창의성 부족'이라는 혹평을 받았던 허정무호가 돌아봐야 할 부분이다.

 

논스톱 슈팅과 스루패스의 증가는 경기 속도와 연관이 있다. 압박이 보편화된 현대축구에서 개인기를 앞세워 볼을 끄는 플레이는 차단 당하기 쉽다. 거센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는 경기속도를 더 높여야 했고, 자연히 패스이건 슛이건 빠른 트래핑에 이은 '원터치' 플레이로 해결하는 장면이 늘어났다.

 

유로 2008에서는 예전처럼 화려한 발재간을 내세워 드리블 돌파에 이은 득점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반면 좌우 크로스나 스루패스에 이은 논스톱 슈팅에 이은 득점은 크게 늘어났다. 다른 유럽강호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떨어지던 러시아와 터키가 4강신화를 작성할수 있었던 것도, 빠른 원터치에 이은 간결하고 효율적인 플레이를 잘 살려서 팀의 약점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축구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이처럼 간결한 원터치 플레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수들이 볼키핑이 불안하다 보니 후속플레이가 매끄럽지 않고, 자신감이 부족하여 머뭇거리다가 밀집수비에 둘러싸이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의 중위권 팀들에게도 이정도일진대, 최종예선이나 나아가 올림픽, 월드컵 본선 같은 세계적인 무대에서는 더더욱 통하지 않는다.

 

확실한 색깔이 필요하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축구 조별리그 D조 2차전이 열린 10일 중국 친황다오 스포츠센터스타디움에서 한국 원정응원단이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축구 조별리그 D조 2차전이 열린 10일 중국 친황다오 스포츠센터스타디움에서 한국 원정응원단이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 남소연

지난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서 한국축구가 이탈리아에 0-3으로 대패하며 8강진출에 실패한 경우, 개인기와 기술의 격차를 지적하는 비판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도 아니었고, 이번 대회의 결과만을 놓고 볼 때 그리 새삼스러운 지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올림픽대표팀이 보여준 근본적인 문제는 최종예선에서 한국축구만의 고유한 색깔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팀들은 저마다 확실한 색깔을 갖추고 있었다. 우승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의 경우, 선수들의 압도적인 개인 능력이 돋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러한 선수들의 개인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과 부분 전술이 뒷받침되어있었기에 가능했다.

 

리오넬 메시나 호나우지뉴 같이 개인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사실상 프리 롤로 배치하고, 리켈메·아게로·라파엘 같은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공간을 창출하는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화려한 플레이의 이면에는 선수들의 강력한 체력과 안정된 수비 조직력, 그리고 폭넓은 전술 이해도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이 가장 본받을 만한 플레이를 보여준 것은 벨기에였다. 화려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지만 가장 효율적인 플레이를 선보인 벨기에는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역습'의 교과서였다. 이탈리아나 브라질 같이 개인기가 뛰어난 팀들을 상대로 중원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으로 볼의 흐름을 차단하고, 한두 차례의 패스로 순식간에 상대 문전까지 침투하는 스피드가 돋보였다. 측면 수비수들이 오버래핑에 가담할 경우,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톱니바퀴 같은 커버링으로 상대의 역습을 차단하는 조직력도 인상적이었다.

 

준우승을 차지한 나이지리아도 아프리카 특유의 탄력을 이용한 개인기 못지않게, 포지션을 아우르는 선수들의 유기적인 공수가담과 활발한 2선 침투를 통한 창조적인 플레이가 돋보였다. 언제까지 개인기와 기술이 뒤진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개인기와 기술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축구만의 고유한 색깔이 있는가를 먼저 고민했어야 한다.

 

유로 2008과 베이징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단순히 세계축구와의 격차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축구에 현재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축구의 이러한 트렌드들을 한국축구에 어떻게 실용적으로 접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팬들이 허정무호에 기대하는 것도 단순히 대표팀 성적에 일비일희하는 것을 넘어 한국축구가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2008.09.04 10:05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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