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또 한 명의 '농구대잔치 세대' 스타가 코트를 떠났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이상민에 이어 우지원(37·울산 모비스)도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경복고-연세대를 졸업하고 97년 대우 제우스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우지원은 대학 시절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과 함께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연세대 '독수리 군단'의 주역이었다. 93~94시즌에는 대학팀 사상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며 신세대 스포츠스타로 급부상했다.

우지원은 대학 졸업 이후 프로에서도 97년부터 원년 멤버로 활약했던 '프로화 1세대'로, 프로농구가 단기간에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냈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진 '그의 노력'

 현역 은퇴를 택한 우지원 선수.

현역 은퇴를 택한 우지원 선수. ⓒ 울산모비스

운동선수답지 않은 수려한 마스크와 감각적인 슈팅 능력을 앞세워 농구대잔치 세대가 배출한 숱한 스타플레이어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꽃미남으로 불린 우지원. 그는 당시 수많은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며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출중한 외모만이 우지원의 전부는 아니었다. 우지원은 문경은, 김영만, 조성원 등과 함께 90년대 농구대잔치 세대가 배출한 대표적인 '정통슈터' 중 한명이었다.

군복무 시절인 98~99시즌을 제외하고 총 13시즌간 573경기에 출전해 평균 12.8점. 2.5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프로통산 1116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서울 SK 문경은(1669개)에 이어 이 부문 역대 2위에 올라있다. 통산 7차례나 올스타에 선발됐고 그 가운데 베스트 5에 3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많은 이들이 우지원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그가 당대 가장 뛰어난 노력파 선수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우지원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그 후 팔이 교정되지 않고 한 쪽으로 심하게 휘어지게 됐다고.

그래서일까, 우지원의 슛폼은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정상적이지 않고 종종 각도가 휘어진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런 독특한 슛폼을 가지고도 우지원의 통산 3점슛 성공률은 무려 40.1%(1116/2782)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저런 슛폼을 가지고 적중률이 높은 건 선수가 얼마나 끊임없이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혀를 내둘렀다.

우지원, 그 영욕의 농구인생

농구대잔치 세대 스타 중에서 알고보면 우지원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선수도 없을 것이다. 20대 시절 우지원에 대하여 많은 팬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중 하나가 '몸싸움 등 궂은 일을 잘하지 않을 것 같다', '받아먹기 슛밖에 할 줄 모르는 왕자 농구를 한다'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실제 우지원은 뛰어난 패싱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시스트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리바운드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선수였다.

젊은 시절 그의 별명이었던 '코트의 황태자'라는 닉네임은 그의 외모와 인기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선수 우지원'의 이미지에는 독으로 작용한 면도 없지 않다. 우지원은 대학후배인 서장훈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외모로 인하여 편견에 시달렸던 케이스라고 할 수있다.

순탄했던 대학시절과 달리, 프로무대에서 우지원의 농구인생은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했다. 프로 초창기에는 팀의 주포로서 매경기 20점 가까운 득점을 올리고도 정작 팀성적과는 인연이 없어서 '영양가 없는 에이스'라는 혹평에 시달려야했다.

99-00시즌 신세기 빅스에서는 농구인생 최초로 꼴찌를 당하는 굴욕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후 01~02시즌에서는 대학선배인 문경은과 트레이드되어 삼성으로 이적했으나 역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모비스로 팀을 옮겼다.

03~04시즌 말미에는 우지원의 농구인생에 '주홍글씨'로 남게되는 대형사고를 저지르게 된다. 바로 대학 선배 문경은과 함께 벌인 '타이틀 조작' 논란이다. 문경은과 우지원은 3점슛 타이틀 경쟁을 펼치던 2004년 3월 7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각각 66점과 70점을 넣어 '기록 밀어주기'라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우지원은 이날 21개의 3점슛, 문경은은  22개를 성공시켰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빛이 바랬다. 사건이 커지면서 결국 개인 타이틀 수상은 취소됐지만 결국 득점과 3점슛 기록은 그대로 인정받으며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타이틀 경쟁에 눈이 멀어 꼴사나운 추태를 연출했던 우지원과 문경은은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프로농구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물론 선수 개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지금도 KBL 사상 가장 '추잡한' 타이틀 경쟁의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우지원은 08~09시즌에는 올스타 팬투표 조작 논란에 휩쓸리기도 했다. 2008년 12월 올스타 팬투표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점에 우지원 본인 아이디로 팬클럽 회원들에게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단체 쪽지를 발송한 것이 알려진 것. 결국 이 사건은 당사자가 아닌 열성적인 팬들의 빗나간 애정이 벌인 해프닝으로 결론이 났지만 개인의 신상정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디와 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책임과 2004년 '타이틀 조작' 논란 당시의 '전과'가 겹쳐지며 우지원은 또 한 번 집중포화를 맞아야했다.

코트의 황태자, 마당쇠로 변신하다

 은퇴를 선언한 우지원 선수.

은퇴를 선언한 우지원 선수. ⓒ 울산모비스

전성기를 지나 기량으로서나 이미지로서나 점점 하향세를 겪던 시점에 모비스 유재학 감독과 재회한 건 바닥으로 떨어지던 우지원의 농구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유재학 감독은 우지원의 장점을 살려 그를 고비에서 해결사로 기용하는 '식스맨' 역할을 맡겼고, 우지원은 에이스의 부담감을 던 채 '마당쇠'로 변신하여 궂은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는 팀마다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징크스를 깨고 모비스는 2006-07시즌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며 우지원은 식스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특히 많지 않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잠깐씩 나올 때마다 팀에 소금같은 3점슛을 넣어주는 우지원의 '킬러본능'은 클러치 슈터의 교본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농구대잔치 세대 스타들이 대부분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급격하게 하향세를 걸었던 것과 달리, 우지원의 장수 비결은 달라진 시대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변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우지원은 슈터로서 그 어떤 선수보다 장단점이 분명한 선수였지만 달라진 프로농구 트렌드에서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역할과 재능을 정확히 인지하고 변화를 받아들였다.

비록 2004년 타이틀 조작 논란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었지만, 우지원은 2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꽃미남 스타로 장수하면서도 코트 안에서는 깔끔한 매너로 사랑받았고, 사생활에서 불미스러운 루머나 스캔들에 연루되는 일 없이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이어왔다. 우지원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그 기량을 다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져야했던 많은 스타들에 비하여 우지원의 자기관리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09~10시즌이 끝나고 현역 생활 연장과 은퇴 기로에 놓였던 우지원은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갈등을 거듭했으나 결국 박수칠 때 떠나기로 결심하고 제 2의 인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를 능가하는 차세대 슈터들과 농구대잔치 세대의 인기를 이어받을 수 있는 스타의 발굴은 앞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될 우지원에게 남겨진 또다른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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