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이다. 밤이 제법 차다. 갈대숲을 거닐 때의 아슥아슥 살결의 떨림처럼 전신으로 찬 밤이 온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대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든지, 어디서라도 이런 찬 바람을 함께 나누며 거닐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죽을때까지 최선을 다해 당신과 함께 할거야.'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가을 밤은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생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보는 티

생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보는 티 ⓒ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해 보진 않았지만 그런 이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 심정 또한 아플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으로 인해서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면 난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내 자신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임은 분명해진다. 나를 포기하고 당신에게 다가설 수 있다면 그 당신이라는 존재는 나를 몇 번이고 흔들리게 했던 사람이겠지. 난 내게 남아있는 긍정적인 힘을 죽어가는 이를 위해 힘써서 전이시키려고 하겠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 또한 그가 없다면 내 인생 또한 없는 것이기에.

난 <당신에게 내가 없다면>에 등장하는 트롱이란 인물에게 영화를 보는 내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정적이고 매일같이 헤로인을 자신의 몸에 투여할 뿐만 아니라 살아가려는 의욕 또한 부족하다. 그는 에이즈 보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 하루를 그저 의미없이 스쳐보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땔 수가 없었다.

긍정적인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어가는 인간이지만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 역시 감성을 가진, 더구나 지나치게 많은 양과 높은 질감의 감성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꺼져가는 초의 불빛을 보며 트롱은 말한다. 자신도 불빛처럼 서서히 꺼져갈 것이라고. 그는 생에 대한 끈을 쥐어잡고 있지 않지만 누구보다 깊게 생을 응시하고 사유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거침 바늘은 그의 피와 섞여서 머리속을 온통 혼잡하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죽기까지 그는 시처럼 말하고 소설처럼 생각한다.

 시로 말하고 소설로 사유하는 트롱

시로 말하고 소설로 사유하는 트롱 ⓒ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이에 반해 티는 끝까지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헤로인 주사 넣는 것을 줄이려하고 요양소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안간힘을 다한다. 물론 완벽하게 자신을 제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생을 향한 의지가 남아있다. 모든 것이 그의 곁에 있는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평범한 자신의 삶과 달리 약물로 인해서 고통받는 남편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결같이 그를 위해서 희생하려 한다.

병으로 인해 아이도 가지지 못했으며 일도 할 수 없는 남편. 그녀에게는 짐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다면 촛불처럼 사라질 남편이기에 그녀는 남편을 돌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은 남편보다 그런 아내에게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곁에서 죽음에 대해 정면적으로 도전하며 노력해가는 모습을 관찰한다. 이것은 트롱과는 전적으로 대비되지만 그나마 삶의 반쪽에는 희망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듯하다.

죽음을 기다려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어떤 슬픔을 전해 주는 지도 아직 모른다. 슬픈 기운은 슬픔으로, 아픈 기운은 아픔으로 전해질 것이다. 티의 아내 역시 그 슬픔과 아픔을 모두 견뎌내며 남편이 되살아 나기를 간곡히 기다릴 것이다. 더불어 죽어가는 트롱 역시 한 순간 한 순간 자신에게 남은 그러한 기운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문득 지금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사실을 다룬 다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둘 중 누군가의 불빛은 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을 향해서 꾸준히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삶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영화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말, 찬 밤이다.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아내, 당신에게 내가 없다면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아내, 당신에게 내가 없다면 ⓒ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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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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