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관계> 포스터

<위험한 관계>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이라는 역설을 그리는 남자, 허진호.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불멸의 작품을 데뷔작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속편 <봄날은 간다>는 개인적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뛰어넘는 진화이며, 허진호라는 사람 자체를 녹여 낸 작품이라고 평하는 작품입니다. 왜냐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종종 보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판타지가 사라진 <봄날은 간다>는 사랑뿐만 아니라 허진호, 남자 그리고 사람 자체의 인생마저도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허진호의 작품에는 조성우 음악감독이 있습니다. 늘 사랑의 향수(鄕愁)를 그리는 허진호라는 향수(香水)에서 조성우의 음악은 잔향(殘香)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음악을 전공하지 못한 것이 야속하리만큼 그의 음악은 허진호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색적이고 느린 허진호 영화에서 조성우의 음악이 흐르면 캠프파이어의 촛불처럼 내면의 자아와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헌데 이후 허진호의 작품들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외출> <행복>이 이전 작품들을 흥행, 작품성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그리하여 허진호는 중국으로 시선을 돌려 <호우시절>을 만듭니다. <호우시절>은 초기 허진호의 감수성을 재생시키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흥행에서 엄청난 실패를 맛봅니다. 그런데 허진호는 중국에서 가능성을 찾아냈는지 최신작 <위험한 관계>에서 1930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장동건 제외) 중국 배우들과 중국 자본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라는 역설... 허진호 감독

다시 돌아온 허진호의 <위험한 관계>는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두고 있는 작품으로, 이미 1988년 존 말코비치 주연의 <위험한 관계>, 1989년 콜린 퍼스 주연 <발몽>, 1999년 라이언 필립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그리고 2003년 배용준 이미숙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 유명하다 못해 하도 우려먹어서 사골에 구멍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허진호는 왜 이 큰 위험부담을 앉고서 <위험한 관계>를 찍었을까요?

작가론으로 볼 때 그 답은 나옵니다. <위험한 관계>는 기존의 허진호 작품들과 유사한 점들이 존재합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사랑을 하려 하지만 상실과 죽음이 죄의식으로 작용해 장애물이 되고, 그 사랑은 완성형이 되지 못한 채 끝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이는 성장합니다.

허진호는 적은 컷 수와 클로즈업이 아닌 거리두기로 덤덤하게 바라봅니다. 짧게 예를 들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불치병에 걸리고 그것이 갈등이 됩니다. <봄날은 간다>에서는 은수는 이혼의 아픔,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 <외출>에서 인수와 서영은 불륜관계인 각자의 배우자들이 식물인간이 되고, <행복>에서 은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 그리고 <호우시절>에선 쓰촨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메이가 나옵니다.

다시 <위험한 관계>를 보면, 1930년대 상하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셰이판(장동건)과 뚜펀위(장쯔이)의 사랑을 그려냅니다. 뚜펀위는 미망인으로서 허진호의 다른 작품처럼 남편의 죽음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셰이판의 구애에 갈등합니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셰이판의 죽음으로 이뤄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의 허진호 영화와 많이 다릅니다. 늘 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시골은 아닌 중소도시를 그리던 허진호. 군산, 삼척, 강릉, 장수를 거쳐 중국에서 촬영한 <호우시절>마저 쓰촨(四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위험한 국제 정세와는 상환 없는 듯 환락의 도시 상하이(上海)에서 최상층의 사랑을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에 발맞추듯 이전 영화보다 빠른 컷과 클로즈업,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조성우의 음악 역시, 기존의 잔잔하고 사색적인 느낌이 아닌, 떨리는 심장을 표현하듯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표현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셰이판의 죽음은 상당히 신파적인 느낌을 줍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심은하)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했던 정원(한석규)과(그래서 영화는 그의 죽음을 자세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셰이판을 비교해보면 그의 영화가 너무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클로즈업과 인물의 정서를 드러내는 음악. 그래서 늘 죽음 너머 무언가를 사색하게 만드는 그의 은유법과는 달리 <위험한 관계>에서 셰이판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무의미한 '질겅질겅'만 반복... 억지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어쩌면 지금이 '불행한' 허진호를 놓아야 할 순간일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중시하는 '기존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가'라는 점에서 바라볼 때, 확실히 허진호는 꾸준히 변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을 볼 때, 사랑에 대한 맹목적인 남자에서 여자를 버리는 남자가 되고 사랑을 게임으로 즐기는 바람둥이도 됩니다. 또한 늘 여성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건너뛰고, 연애의 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던 그의 연출은 점점 설명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허진호를 놓고 <위험한 관계>를 보아도, 이 영화는 빠져들기 어렵습니다. 워낙 유명한 원작을 리메이크 했다는 점에서, 결국 스토리에 집중하기보다는 '허진호식' 연출에 기댈 수밖에 없으며, 1930년 중국 상하이의 최상층의 호화스러운 사랑은 소시민으로서 한국에 거주하는 저로서는 시대적으로도, 장소적으로도 공함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저 돈 많은 사람들의 화려하지만 허무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극영화'의 느낌만이 가득합니다.

특히나 셰이판의 죽음은 죽음이 삶의 연장선이 아닌, 이야기의 끝으로 끝나버리는 죽음이기에 그 안에서 인간사를 관통하는 깊은 사색도,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흔적들도 발견되지 않아 무의미한 '질겅질겅'만 반복할 뿐입니다. 심지어 허진호 영화팬으로서 '이 부분에서 내가 울어주어야 하나?' 하며 억지 눈물까지 흘려보려 했습니다. 

글을 정리하며 생각해보면, <위험한 관계>에서 진짜 허진호 영화다운 인물은 모지에위(장백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허진호 영화처럼 셰이판과 모이지위의 사랑을 과감히 생략해버렸으며, 마지막에 질투심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하며, 죄책감까지 짊어져야 하는 절규를 보며 이 영화는 사실 모지에위를 주인공으로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허진호를 안고 보아도, 허진호를 놓고 보아도 <위험한 관계>는 공감 가지 않는, 그저 허진호라는 베테랑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만 보이는 '인형극' 같습니다. 이 생각이 여전히 허진호를 아프게 하는 생각이겠지만 차라리 모지에위의 시선으로 그려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아쉬움만 남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hoohoot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관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