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안나' 역할의 프로필 이미지.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안나' 역할을 맡은 배우 안은진. 대학로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극이지만, 캐릭터 활용에서 아쉬움이 많다. ⓒ 쇼온컴퍼니


<블랙 메리 포핀스>는 이미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 분야에서 하나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블랙 메리 포핀스>를 거쳐 갔으며, 많은 '블덕'(<블랙 메리 포핀스> 마니아)들은 몇 시즌 째 지속해서 올라오는 이 작품을 꾸준히 재관람하고 있다.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던 <블랙 메리 포핀스>는 특히 기존의 '한스 시점'이던 공연을 '헤르만 시점'으로 옮기며 기존의 '블덕'이 아닌 뮤지컬 팬들에게도 흥미를 샀다.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던 지난 캐스팅 전성우, 송상은과 함께 요나스에서 한스로 변한 김도빈 외에도 유명하고 인기 많은 배우가 함께했다.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는 올해도 성황리에 대학로 TOM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하지만 <블랙 메리 포핀스>에 언제나 '긍정적인' 화제성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비롯하여 극작, 작곡까지 모두 해낸 서윤미 작가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지난번에는 한스 버전의 공연을 했고, 이번 시즌에 헤르만 버전의 공연을 하고, 언젠가는 요나스 버전으로의 공연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나의 이야기'만큼은 정식 공연을 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안나의 이야기는 대신 <블랙 메리 포핀스>를 사랑하는 관객들만을 초대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방식의 공연으로 대체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는 트위터 등 SNS를 중심으로 많은 뮤지컬 팬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 이는 안나의 극 중 캐릭터 성과도 연관이 됐다.

자기만의 서사가 없는 '안나'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안나' 역할의 프로필 이미지.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안나' 역할을 맡운 이지수 배우. <블랙 메리 포핀스>는 전반적으로 재미있는 그리고 잘 만든 작품이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이고, 극을 사랑하는 팬들도 많다. 그렇기에 더더욱, 더 좋은 극을 만들기 위한 비판이 필요한 게 아닐까. ⓒ 쇼온컴퍼니


극 중 안나는 그라첸 박사에게 '강간'당하는 여성 인물이다.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탓에 일각에서는 이 장면이 관객들에게 '폭력적이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안나에게 '강간을 당했다' 외의 서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나머지 형제 한스와 헤르만, 요나스는 어린 시절 무엇을 꿈꾼다거나, 성인이 되어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헤르만은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요나스는 작가가 되고자 했다. 한스의 어린 시절 꿈이 확실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는 책을 좋아한다는 서브 텍스트가 명확히 존재한다. '마지막 실험' 이후, 성인이 된 인물들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한스는 알코올 중독자 변호사가 됐다. 헤르만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을 만드는 화가가 됐다. 요나스는 발작적으로 오타를 찾아내는 일에 능통하여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안나는 어떻던가. 안나는 어린 시절 무엇을 좋아했는가. 안나는 성인이 되어 어떤 인물이 됐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음악 교사가 됐다는 서브 텍스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극 중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 넘어간다. 물론 안나가 '헤르만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있다. 그러나 '헤르만을 찾아갔다', 이게 진짜 '안나'의 이야기일까? 이 이야기는 헤르만과의 관계를 통해서 파생된 서사일 뿐이다. 즉 온전히 안나가 지닌 이야기는 '이 네 남매 중 유일하게 존재하는, 강간당한 피해자'이다.

안나 외의 모든 '남성' 형제들은 작을지라도 각자만의 이야기를 지녔다는 점이다. 안나의 서사가 강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나라는 '여성' 캐릭터는 곧 '강간당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만약 한스나 헤르만, 요나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여성이었더라면, 안나의 캐릭터성은 지금보다 덜 논란이 됐을지 모른다.

헤르만과 안나가 함께 부르는 듀엣 넘버의 마임 안무에서 헤르만과 안나의 포지션을 떠올려 보자. 헤르만이 어떤 행동을 취하면 안나의 행동은 이를 따라간다. 예를 들어 헤르만이 안나를 당기는 듯한 모션을 취하면 안나는 이에 당겨진다. 이는 헤르만의 위치가 '테이크'하는 입장이라면, 안나는 그저 '기브'하는 입장이라는 걸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창작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칫 안나의 존재를 헤르만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국한할 여지가 있다.

이는 사회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와 또 한 번 맞닿는다. 더 나아가 헤르만과 안나의 안무는 안나를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곡예' 넘버에서 안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곧 헤르만의 손길에 의해 조각상이 되지 않던가. 결국, 이성애적 로맨스를 보여주는 듯한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헤르만이 '테이크'한다면 '기브'하고, 헤르만의 작품이라는 명목을 통하여 '객체화'되기 때문이다.

안나 역시 네 명의 피해자 중 하나이다. '안나의 이야기'가 극 중에서 침묵된다는 건, 피해자가 침묵하도록 종용하는 현실과 맞닿으며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할 여지를 남긴다. 이는 '안나의 방'(안나 시점의 공연)이 설령 만들어진대도 마찬가지다. 1회성 관객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고 불특정한 관객들이 만날 수 있는 남성 화자의 이야기, 소수 마니아층 관객들에게만 전해지는 여성 화자의 이야기. 두 서사는 파급력도, 대중성도, 모두 다르다. 어쨌든 뮤지컬은 '대중 예술'이고, 이는 극을 관람한 수많은 관객을 통해서 함께 완성된다. 극히 소수일 관객들만을 만나면서 안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피해자의 내면의 전부라는 것은, 자칫 기만적일 수 있다. 안나의 이야기는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할 이야기이다.

안나의 캐릭터에 대한 논란은 서윤미 작가의 예전 인터뷰를 참조하면 더 불거진다. 서윤미 작가는 지난 2012년 블랙 메리 포핀스 초연 때 한 인터뷰(박세은, <뉴스테이지>,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의 아껴둔 이야기들, 서윤미 연출가 인터뷰①, 2012년 7월 27일)를 통해 '헤르만이 안나를 죽였다'는 설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물론 이 설정대로 공연이 올라오진 않았지만, 극을 구상할 당시에 이런 여지가 있었다는 게, 현재 안나의 캐릭터 성과 맞닿게 된다. 안나의 역할은 그저 그 정도뿐인 것인가. 온전한 피해자로 남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설사 안나가 '완전한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비판점의 주요 부분이 흔들리는 건 아니다. 비단 이 질문은 <블랙 메리 포핀스>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극 중 '여성 캐릭터'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냐는, 더욱 거시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서 지워진 여자

'안나' 송상은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에 '안나' 역으로 출연 중인 배우 송상은의 개인 프로필 및 공연 이미지. 지난 8일 오후 4시,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에 '안나' 역으로 출연 중인 배우 송상은의 프로필 이미지. 남자 형제들의 이야기가 갈등의 주요 축이 되면서, 안나의 이야기는 별 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 여성의 이야기가 지워져야 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 쇼온컴퍼니


작품 내의 갈등 구조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입하면, 이러한 문제점들을 파악하기 용이해진다. 극 중 상징들을 살펴보면, 극의 서사는 남성 캐릭터들에게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 더욱 명확히 다가온다. '아버지'인 그라첸 박사를 죽인다는 것은 곧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물론 박사의 생명을 직접 끊은 것은 요나스이지만, 박사가 죽게 되는 계기는 결국 한스, 헤르만, 요나스가 된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아버지'로의 역할은 자연스레 한스에게 넘어간다. 한스는 '아버지'처럼 극 중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럴 때 딴죽을 걸고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헤르만이다. 성인 한스가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기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헤르만은 이제 아버지를 죽여야 할 또 다른 아들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스의 부재 상황 시, 아버지가 될 것은 '헤르만'이기 때문이다. 결국, 극은 두 '새로운 상징적인 아버지'와 '상징적인 아들'과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이 갈등에서 요나스와 안나 모두 주변화되지만, 요나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 작품을 끌고 갈 열쇠를 쥐게 된다. 마지막에 발언권을 행하는 것 역시 요나스이다. 안나에 비하면 캐릭터의 행동반경이 넓다. 하지만 안나는 어떠한가. 이 남성끼리의 대결에서 여성은 끼어들지 못한다.

안나는 프로필 사진부터 여타 캐릭터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안나는 마치 '순결'을 강조하듯 흰옷을 입었으며, 심지어 한 배우는 화환을 머리에 쓰고 있다. 그리고 극 중에서도 안나는 내내 '순결한 캐릭터'처럼 이야기된다. 그리하여 안나는 '순결한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안나가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면 안 되는가?

물론 그녀를 '순결한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그녀가 '순결'한 여성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가 당한 성범죄, 그리고 그 배경이 된 독일 나치 등의 정치적 상황은 문제다. 본질적인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문제화하지 않고, '순결하고 어린 소녀가 성범죄의 대상이 됐다'는 것으로 안나의 상황을 문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진짜 문제를 가린다.

극 중에서 한스는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점점 심해졌다는 기록을 이야기하며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적인 상황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는 개인의 삶을 형편없이 망가뜨리며 트라우마를 주기도 한다. 어쩌면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그런 정치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안나의 삶에게, <블랙 메리 포핀스>라는 뮤지컬에게, 이를 보는 관객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의 여성들에게 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불행과 동행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불행을 살 필요는 없다. <블랙 메리 포핀스>는 극 내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여성 혐오로 일부 관객에게 '불행'과 '트라우마'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는 동행할 수 있어도, 성차별과는 동행할 수는 없다. 여성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젠더적인 문제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비단 <블랙 메리 포핀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다만, 국내 공연계 전반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서, 이 문제작 <블랙 메리 포핀스>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제안하려 한다.

페미니즘 여성주의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페미니스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