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피의자 관련 조사로 8일, 10일 남재준 전 국정원장(왼쪽)과 이병호 전 국정원장(오른쪽)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피의자 관련 조사로 8일, 10일 남재준 전 국정원장(왼쪽)과 이병호 전 국정원장(오른쪽)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했다. ⓒ 이희훈/유성호


"국정원 직원들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고의 전사들이다. 그들이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찬사를 받지는 못할망정 수사를 받다가 목숨을 끊는 참담한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국정원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데 오히려 국정원이 큰 상처를 받고 흔들린다. 크게 걱정된다."

박근혜 전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국정원) 수장을 지냈던 남재준 전 원장과 이병호 전 원장이 각각 8일과 10일 검찰에 출석하면서 남긴 말들이다.

국정원이 특수활동비를 빼내 청와대에 뇌물로 상납했고, 국내정치에 개입한 일은 국가 기강을 뒤흔든 중대 사건이다. 그러나 한때 국정원 총책임자로 조직을 지휘했던 이들에게서 이 같은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왜 국정원을 흔드냐는 식이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이들이 이토록 당당한 건 국정원이 온전히 법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별로 없어서다. 국정원은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법 위에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누구나 변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주인공 제임스 도노반은 '국가 안보' 논리도 법의 정신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주인공 제임스 도노반은 '국가 안보' 논리도 법의 정신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5년작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법을 초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작품은 미·소 냉전이 첨예하던 1957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의 실화를 영화화 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 분)을 기밀누설 혐의로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체포한다. 보험전문 변호사인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은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된다. 그가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된 건 자의가 아니었다. 변호사협회의 만장일치 투표로 도노반이 뽑힌 것이다. 결국 도노반 입장에선 사실상 재판을 떠맡게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변호인을 내세운 건 아벨의 기소가 적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도노반은 이번 사건이 부담스럽다. 당시 미국 여론은 소련에 적대적이었다. 소련과의 핵 전쟁은 기정사실이었고, 아이들조차 핵 전쟁에 대비해 대피하는 방법을 익힌다. 이 와중에 적국 스파이의 변호를 맡았으니 도노반 마저 스파이로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도노반은 변호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히 임한다. "누구에게나 변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는 신념 하에 아벨의 인권 보호에 전력을 기울인다. 아벨 조차 도노반에게 의아해 한다. 아벨은 자신을 면회 온 도노반에게 왜 그토록 변호에 열심인 이유를 물었고 도노반은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간첩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소. 미국 법상 간첩 혐의 입증은 검찰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러나 재판부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아벨을 단죄하려 한다. 도노반은 자료 검토를 위해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나, 판사는 이 요구를 간단하게 거절한다. 그럼에도 도노반은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 법률가로서 최선을 다한다. 일단 판사를 찾아가 "향후 미국인이 소련에 억류되는 사태를 대비해 아벨을 살려두는 게 낫다"고 설득한다. 또 대법원에 청원을 내 아벨을 규범과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래는 도노반의 변론이다.

"아벨이 비록 스파이지만, 미국의 건국정신과 헌법에 맞게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는 미국으로 전향을 거부한 채 자신의 조국에 충실했으니 훌륭한 군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를 규범과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소련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우위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저 요식행위로 재판을 진행하려던 당국은 도노반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에 요원을 붙여 그의 뒤를 쫓는다. 도노반은 비가 퍼붓던 어느 저녁 시간, 자신을 미행하던 요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을 호프만이라고 소개한 이 요원은 도노반에게 적국 스파이 변론에 열심인지 이유를 묻는다. 도노반은 여기서 또 한 번, 헌법 정신을 강조한다.

"호프만? 독일식 이름이군. 난 도노반, 아일랜드인이지. 부모님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네. 자네와 내가 어떻게 미국인이 됐는 줄 아나? 바로 '규정집'(rule book), 고상한 말로 헌법 때문이야. 그러니 내 말 알아들은 척 고개 끄덕이지 마, 이 개자식아 !"

 미 U2 정찰기 조종사인 게리 파워스(오스틴 스토웰)는 소련에 억류된다. 이에 미국은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과 그를 맞바꾸기로 결정한다.

미 U2 정찰기 조종사인 게리 파워스(오스틴 스토웰)는 소련에 억류된다. 이에 미국은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과 그를 맞바꾸기로 결정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도노반의 노력 덕에 아벨은 사형을 면한다. 또 도노반의 예상대로 미 U2 정찰기 조종사 게리 파워스(오스틴 스토웰)가 소련에 억류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미 중앙정보부(CIA)는 아벨을 내주고 게리 파워스를 받기로 소련 측과 합의한다. 그리고 맞교환의 임무를 도노반에게 맡긴다. 도노반은 다시 한 번 법률가로서 직업의식을 발휘해 게리 파워스를 미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도노반 역을 맡은 톰 행크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그리고 코엔 형제는 군더더기 없는 각본으로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1950년대 미국과 동베를린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건 또 하나의 묘미다. 그리고 무엇보다 '냉전의 시대 상황에도 헌법정신만은 거스를 수 없다'는 메시지는 전 정권 국정원장이 검찰에 줄소환되는 현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국정원, 법의 지배 배워라

앞서 적었듯 그간 국정원, 보안사령부 등 우리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법 위에 군림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유성옥 전 심리전단장이 폭로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발언은 무척 시사적이다. 댓글공작 등 혐의로 구속된 유 전 단장은 원 전 원장이 "'적법 범위 내에서 일할 것 같으면 국정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국정원은 법을 초월해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고 폭로했다. 참으로 오만방자하지만, 일정 수준 현실이 반영된 발언이다.

사실 정보기관은 합법과 불법 사이에 놓인, 희미한 경계선에서 움직인다. 경우에 따라선 과도한 법 적용은 정보기관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들의 행위를 규정할 최소한의 법 조항이 필요하다. 게다가 한 번도 법 아래 놓인 적 없는 국정원과 보안사는 이제 차근차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보기관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 그 나라의 안위는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지난 9년 동안 국정원의 행태는 국가 공동체의 기반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국민들은 지난해 겨울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그러니 전직 국정원장들은 겸허하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길 바란다.

스파이 브릿지 국가정보원 남재준 이병호 원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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