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해외에서 한 달을 살아볼 요량으로 스페인으로 향했을 때다. 노트북 앞에 앉아 몇 날 며칠 발품을 판 끝에 저렴한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베이징을 경유하는 중국을 대표하는 국적기였다. 다른 항공편에 견줘 턱없이 싸서 끊는 순간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이전 해외여행에서도 몇 차례 중국 국적기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썩 내키진 않았지만, 호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여행자에게 저렴한 숙소와 더불어 값싼 항공권만큼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전체 여행 경비에서 항공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 탓이다.

하필 출발일이 그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인 게 화근이었다.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시간은 밤 9시 무렵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뒤 비좁은 좌석에 기대어 가까스로 잠을 청하려던 바로 그때, 갑자기 객실 내부가 환해지고 요란스러운 음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정각 12시였다. 팡파르에 이어 객실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즉석 행사가 열렸다. 고깔모자를 쓰고 산타클로스로 변장한 승무원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승객들을 상대로 갖가지 게임을 진행했다. 얼추 1시간이 넘도록 왁자지껄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도중 한 서양인 승객이 승무원에게 다가가 항의를 하고서야 비로소 파티가 끝났다. 기내에 중국인만 타고 있었다면 파티는 밤새 계속됐을지도 모른다. 한 번 후끈 달아오른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기내에 조명이 꺼질 때까지는 한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국의 국적기여서 편안해서였을까. 중국인 승객들은 주인 행세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통로를 막아서다시피 했고, 무람없이 다른 승객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서양인 승객들은 하나같이 눈가리개와 귀마개 차림이었다. 

자정에 맞춘 기내 행사가 예정돼 있었을 수도 있고, 중국인 승객 모두가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부러 다가와 서툰 영어로 소란스럽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다만, 기내에서 오성홍기까지 흔들어대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적이 두려웠다. 

더 당혹스러웠던 건 중국 선수와 관중들의 태도
 
누구 손이 나쁜 손?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 경기에서 헝가리의 사올린 샨도르 류(왼쪽)와 중국의 렌지웨이가 결승선을 향하다 서로 손으로 밀어내고 있다.

▲ 누구 손이 나쁜 손?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 경기에서 헝가리의 사올린 샨도르 류(왼쪽)와 중국의 렌지웨이가 결승선을 향하다 서로 손으로 밀어내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건 이번 베이징 겨울 올림픽의 쇼트트랙 경기를 지켜보고서다. 여기서 우리나라 선수의 석연찮은 실격과 중국인에 대한 편파 판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려는 건 아니다. 카메라에 잡힌 중국인 선수와 응원단의 기뻐하는 모습이 그때만큼 두려워서다.

이미 세계적인 화제가 돼버린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전. 간발의 차이로 결승선을 통과하던 헝가리 선수와 중국 선수가 서로 패대기치듯 몸싸움을 한 바로 그 엽기적인 장면 말이다. 인터넷에선 지금까지도 이를 두고 '쇼트트랙의 UFC 종목'이라며 한껏 조롱하고 있다. 

화면에선 중국 선수의 명백한 반칙으로 보이지만, 심판은 헝가리 선수에게 책임을 물어 실격시켰다. 두 선수 모두 손을 썼고, 결승선을 앞두고는 더욱 격렬해졌다. 스포츠맨십에 반할뿐더러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추태였다. 

결국 금메달과 은메달이 중국 선수들의 차지가 됐다. 유력한 메달 후보였던 우리나라 선수들이 죄다 실격당한 터라 결승전에 오른 다섯 명은 중국과 헝가리 선수들뿐이었다. 1위를 한 헝가리 선수마저 끝내 실격당하고 말았다. 

중계한 해설진은 연신 격앙된 목소리로 심판의 황당한 판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헝가리 선수와 코치진도 당황스러워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같은 날 여자 500m 쇼트트랙 경기에서 경계 블록을 상대의 스케이트에 밀어 넣어 넘어뜨린 중국 선수의 비열한 행태에 공분하던 차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판정에 이은 중국 선수의 메달 싹쓸이보다 더 당혹스러웠던 건 이후 보여준 중국 선수와 관중들의 태도였다. 해당 선수는 감격해하며 대형 국기를 높이 들고 트랙을 돌았고, 관중들은 양손에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순간 경기장은 오성홍기로 뒤덮였다.

그들은 TV를 통해서 본 우리보다 현장에서 더 똑똑히 봤을 것이다. 그 늦은 시간까지 관중석을 떠나지 않은 쇼트트랙 팬이라면, 심판의 판정과 별개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장면임을 모르진 않을 테다. 

실격당한 다른 나라 선수에 대한 배려도, 함께 넘어진 동료에 대한 예의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1등이니 기쁘고, 시상대에 자국의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울려 퍼지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들끼리 서로 얼싸안고 환호작약하는 모습에서 감동이 느껴질 리 만무하다.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
 
응원하는 중국 관중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 사흘째인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경기에서 중국 관중이 자국 선수를 응원하고 있다.

▲ 응원하는 중국 관중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 사흘째인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경기에서 중국 관중이 자국 선수를 응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정당당한 꼴찌가 우격다짐으로 따낸 금메달보다 훨씬 값진 법이다. 국적과 인종, 성별과 나이를 떠나 지켜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스포츠라면, 더는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악다구니 쓰는 경쟁이라면 그저 승자독식의 정글일 뿐이다. 

개막식 직후 느닷없는 '한복 논란'이 벌어졌을 때, 문제를 제기한 일부 언론과 유튜버들의 과민 반응이라고 여겼다. 실상 대선 정국에서 반중 여론을 등에 업고 이를 부추기며 이슈화한 정치권의 행태가 더 큰 문제였다. 그들에겐 표만 되면 외교상 결례쯤은 문제 될 것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 중국을 욕하는 건 온 국민의 '레저 스포츠'가 됐다. 올림픽은커녕 스포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조차 당장 대표팀을 철수시키라고 한마디씩 거들고 있다. 이젠 누구나 중국 하면 무례, 반칙, 편파, 소란 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린다. 

'한복 논란'이 벌어질 때만 해도, '국뽕'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계 중국인, 곧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고, 한복은 그들에게도 고유한 옷 아닌가. 곧, 중국이 여러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임으로 보여준 퍼포먼스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숱한 편파 판정 시비에도 아랑곳없이 중국인의 붉은 함성으로 뒤덮인 경기장의 모습을 보면서, 자꾸만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 '한복 논란'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중국 중심의 국수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잖아도 이번 올림픽이 '중국 체전'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올림픽 폐막이 아직 열흘 가까이 남았다. 스포츠광으로서, 하루빨리 마무리되길 바란 올림픽은 난생처음이다. 경기가 이어질수록 생채기가 덧나고 갈등이 커질 것만 같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세계 각국의 화합과 인류의 평화라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슴 아픈 장면이 있다. 쇼트트랙 1000m에 출전한 박장혁 선수가 준결승전에 오르고도 큰 부상을 입어 출전하지 못하고 기권 처리됐다. 그가 빙판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함께 출전한 네 명의 선수 중 그 누구도 경기 후 그에게 달려오지 않았다. 

그의 부상과 기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준결승전을 치르는 모습이 비정하게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경기 도중 상대의 반칙으로 넘어진 그에게 부상을 입힌 이도 중국 선수다. 그는 준결승전에서 이준서 선수의 실격으로 결승전까지 오르는 행운까지 누렸다.

또 있다. 같은 경기에서 꼴찌였던 터키의 대표 선수가 앞서가던 선수들이 넘어지고 실격당한 덕분에 준결승전에 올랐다. 그것도 예선 이후 두 번이나 반복된 행운이었다. 사상 첫 출전이었던 그는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전에 만세를 불렀을 만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빙판에 쓰러져 안타까워하는 다른 선수들의 모습과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그에게 차마 박수를 보낼 수 없었다. 행운도 실력이라고 여겨서였을까. '어부지리'였을 뿐인데, 그토록 환호하는 모습이 철딱서니 없는 행동으로만 보였다. 물론, 그의 행운은 더 이어지진 않았다.

그들의 환호성에서 숭고한 올림픽 정신을 떠올리긴 힘들다. 금메달과 국익을 동일시한 채, 오로지 1등을 위한 맹목적인 집착만 느껴질 뿐이다. 스포츠맨십조차 찾아보기 힘든 최악의 대회가 됐다. 장담하건대, 이번 올림픽은 '중국이 중국한 국뽕 올림픽'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족 하나. 편파 판정의 직접적 피해자인 우리도 '국뽕'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듯하다.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김선태 감독과 빅토르 안 코치를 향한 맹목적인 비난은 자제되어야 한다. 선수 출신인 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국뽕'을 '국뽕'으로 맞선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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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 국뽕 한복 논쟁 올림픽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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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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