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리흐 샤흐리가 만회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2022.11.23

22일(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리흐 샤흐리가 만회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2022.11.23 ⓒ 연합뉴스

 
2022 카타르월드컵 최초의 이변이자, 어쩌면 역대 월드컵사를 통틀어 손꼽힐만한 반전이 탄생했다. 22일(한국 시각)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타르 월드컵 조별 리그 C조 1차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2-1로 격침시키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객관적인 전력상 양팀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아르헨티나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3위, 사우디는 51위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만 통산 2회 우승을 기록했고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를 앞세워 A매치 36경기 무패행진을 이어가며 이번 대회에서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사우디는 역대 월드컵에 6번이나 나서고도 최고성적이 1994년의 16강 진출 1회에 그쳤다. 4년 전 러시아대회 조별리그에서 러시아에 0-5 대패,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독일에 0-8 참패를 당하는 등,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는 주로 강팀들의 동네북 이미지가 더 강했다.
 
앞서 이번 대회에 출전한 '개최국' 카타르(0-2, 에콰도르), '아시아 피파랭킹 1위' 이란(2-6, 잉글랜드) 등 다른 중동팀들이 첫 경기부터 잇달아 수모를 당한 가운데, 아시아팀 중에서도 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우디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꿈도 희망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공은 둥글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격언은 유효했다.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그린 팔콘(초록매, 사우디 국가대표팀의 애칭)'들은 마치 사막의 성난 모래폭풍처럼 거인 아르헨티나를 휩쓸어버렸다.
 
루사일의 기적은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 분명 전력적인 면에서는 아르헨티나가 크게 앞섰고, 사우디에게 결정적인 운이 따라준 순간도 몇 차례 나왔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 뒷받침되었을 때 진정한 효과를 발휘한다. 사우디는 언더독이 보여줄 수 있는 강점들을 최대한 활용했던 '준비된 도전자'였고,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충분히 승리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사우디는 세계적인 선수는 없지만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특히 오프사이드 트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수차례 무력화시켰다. 이는 특정 선수만이 아니라 수비진의 조직력에 강한 자신감이 있는 팀만 가능한 것이었고, 아르헨티나같이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많은 팀에게는 자칫 자충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우디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오프사이드 트랩은 무려 10개에 이르렀고 그중 7개가 전반에 나왔다.
 
여기서 사우디는 '신기술'의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가 이른 시간에 터진 메시의 선제 페널티킥 골로 앞서는 가운데, 전반 27분과 35분 라우타로의 절묘한 공간 침투에 이어 연속으로 골망을 갈랐으나, 이번 대회부터 도입된 VAR의 '반자동' 오프사이드 판독으로 인해 골이 무산됐다. 판독결과는 정확했지만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오프사이드 판독이 아니었다면 점수차는 3-0으로 벌어졌을 것이고 승부는 그대로 전반에 끝날 수도 있었다.
 
쉽게 갈 수 있었던 경기 분위기가 묘하게 꼬이면서 아르헨티나는 리듬이 깨졌다. 오히려 첫 실점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장점인 수비 조직력을 유지한 사우디 선수들의 집중력이 더 돋보였다.
 
사우디는 후반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반 3분 알브리칸의 패스를 받은 알셰흐리가 빠르게 침투해 침착하게 반대편을 보고 시도한 슈팅이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기세를 탄 사우디는 불과 5분 뒤에는 문전에서 흘러나온 볼을 살림 다우사리가 잡아 수비수를 따돌린 후 오른발로 날카롭게 감아차서 다시 한번 골망을 가르며 역전골을 뽑아냈다. 특히 결승골은 현재까지 이번 대회의 베스트골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운 골이었다.
 
사우디는 이날 경기에서 볼 점유율이 약 30%에 불과했고, 슈팅도 3개에 그쳐 15차례 슈팅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에 크게 뒤졌다. 하지만 이 3번의 슈팅이 모두 상대 골대로 정확하게 향했고, 수비에 블록 당한 1개를 제외하면 나머지 2개가 모두 골망을 가르는 극강의 효율성을 보여줬다. 공을 오래 소유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결정짓는 자가 이긴다는 축구의 진리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22일(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사우디의 사우드 압둘하미드가 돌파하는 아르헨 리오넬 메시를 막아서고 있다. 2022.11.23

22일(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사우디아라비아 경기. 사우디의 사우드 압둘하미드가 돌파하는 아르헨 리오넬 메시를 막아서고 있다. 2022.11.23 ⓒ 연합뉴스


사우디가 드라마같은 역전에 성공하면서 경기장 분위기도 사실상 사우디가 장악했다. 카타르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많은 원정 팬들이 찾아올 수 있었던 사우디로서는 이번 월드컵이 홈경기나 마찬가지였고, 팬들은 열광적인 응원으로 힘을 불어넣었다. 사우디는 실점 이후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과 몸을 날리는 호수비로 조급해진 아르헨티나의 파상공세를 번번이 막아냈다.
 
사우디는 이날 골을 넣은 살림 다우사리와 골키퍼 무하마드 우와이스 등 베스트11중 9명이 자국 리그인 알 힐랄 소속이었다. 슈퍼스타 없이도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다져온 조직력은, 개인능력에서 월드클래스급 선수들이 즐비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령탑인 에르베 르나르 감독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앙골라, 모로코 등 아프리카와 3세계 국가들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며 '하얀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르나르 감독은 2018년 이후 한국대표팀 감독 후보로도 거론된 바 있으며, 이번 아시아 최종 예선 B조에서도 저평가받던 예상을 깨고 사우디를 조 1위를 차지하며 본선진출을 이끈 바 있다. 축구가 결국 '이름값'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이날 충격적인 패배로 16강 진출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남은 상대가 '북중미의 맹주'이자 '16강 보증수표'로 꼽히는 멕시코, 세계적인 골게터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를 앞세운 폴란드라 결코 만만치 않다. 멕시코와 폴란드는 1차전에서 0-0으로 비겨서 승점 1점씩을 나눠가지며 아르헨티나는 졸지에 조 최하위로 추락했다. 간판스타 메시가 일찌감치 이번 대회를 마지막 월드컵이라고 선언한 가운데, 첫 경기부터 역대급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카타르 대회를 '메시의 대관식'으로 치르겠다는 야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됐다.

한편으로 사우디의 이변을 비롯한 아시아팀들의 엇갈린 경기력은 이제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를 앞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도 중요한 힌트가 될 전망이다. 카타르와 이란의 참패는 월드컵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의 멘탈 관리, 선제골 허용 이후의 대처방식, 수비에서 상대의 빠른 측면 침투에 이은 크로스 차단 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또한 사커루 호주는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1-4 패)를 상대로 어설픈 빌드업이 강한 전방압박에 차단되었을 때 어떤 댓가를 치르는지를 톡톡히 보여줬다.
 
반면 사우디의 견고한 수비 조직력과 오프사이드 트랩 활용법, 효율적인 역습과 페널티박스 안에서의 침착성, 강팀을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는 투지 등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부분이다. 한국도 2002년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잇달아 격침시켰고 4년 전에는 당시 디펜딩챔피언 독일을 제압하는 '카잔의 기적'도 연출한 바 있다. 아시아팀과 언더독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벤투호도 또 한 번 못해낼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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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축구 아르헨티나 언더독 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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