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9 19:25최종 업데이트 23.11.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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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는 모습.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권우성

 
금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 118주년이다. 1905년 을사년에 대성공을 거둔 일본은 그로부터 두 번째 을사년인 1965년에도 대성공을 거뒀다(한일협정). 지금 일본은 윤석열 정부 임기 내인 2025년 을사년 때도 한번 더 대성공을 거둘 생각을 하고 있는듯 하다.

일본정부와 궁내청이 3번째 을사년인 2025년에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방한을 성사시켜 "요즘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일한관계의 최종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지난 7월 13일 자 일본 여성지 <조세지신>에 보도됐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보좌하는 수상관저 관계자와 나루히토 일왕을 보좌하는 궁내청 관계자의 인터뷰에 기초했으므로 신빙성이 높은 보도다. (관련 기사: 첫 '일왕 방한' 추진하는 기시다 총리, 무엇을 노리나https://omn.kr/24sl7)


한때 을사보호조약으로도 불렸던 한일협상조약이 1905년 그날 체결됐다는 판단을 전제로 193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IMF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1997년 11월 17일부터 이날을 정부 주관의 기념일로 거행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이 아닌 그다음 날 조인됐다.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조인된 것은 예정일보다 하루 뒤인 18일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에 인용된 조선총독부 발행물에 그렇게 적혀 있다. 총독부가 3·1운동 1년 전인 1918년에 펴낸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ノ保護及倂合)>은 "조인을 마친 것은 실로 11월 18일 오전 1시 반이었다"고 기술한다.

을사오적, 경술국적... 나라 팔아먹은 박제순
 

을사늑약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친일파 박제순. ⓒ 위키공용

 
18일 새벽에 문제의 날인을 해준 인물은 을사오적인 친일파 박제순이다. 외부대신인 그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와 함께 날인한 을사늑약 문서가 1984년 1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공개됐다. 이 문서를 확인한 윤병석 당시 인하대 교수의 진술을 들어보면, 대한제국 외교부 장관인 그가 일본을 위해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알 수 있다.

박제순과 하야시의 직인이 찍힌 늑약 문서 사진과 함께 실린 그해 2월 13일 자 <경향신문> 7면 좌상단 기사는 "박제순 외부대신과 일본 특명전권대사 임권조의 도장만이 찍힌 한문과 일문으로 된 2통의 문서만이 있을 뿐, 고종과 목인(일본천황)이 이 조약을 인정한 비준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라는 윤병석 교수의 진술을 전했다.

윤 교수는 고종황제가 재가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는 물론이고, 메이지라는 연호로 더 많이 불리는 무쓰히토(睦仁)일왕이 재가했다고 알려주는 문서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을사5조약은 서둘러 만든 조잡한 문서로, 박제순과 임권조가 도장을 찍은 시간도 18일 하오 2시였으나 17일로 적혀 있는 날조된 문서였다"고 말했다.

18일 하오(오후) 2시가 아니라 새벽 1시 반쯤이었다. 윤 교수의 착오다. 그의 보고에 나타난 것처럼, 실제로는 18일에 직인을 찍었으면서도 늑약 문서에는 17일로 표기했다. 처음에 일본이 예정했던 17일에 정상적으로 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 측에 끌려다니며 불법성을 묵인해 준 박제순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인 박은식은 1920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을사늑약 당일의 광경을 "17일에는 헌병과 순사들로 하여금 우리의 각부 대신을 입궐시켜 어전회의를 열도록 압박하였다"라며 "이토와 공사 하야시, 대장 하세가와 등은 군사를 끌고 들어와 총포와 창검을 궁전의 섬돌 위에 빽빽하게 늘어세운 후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협의하였다"는 말로 묘사한다.

고종의 비준이 있고 없고 외부대신의 직인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을사늑약은 이 광경만으로도 무효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상적인 조약이 체결될 리 만무하다. 이렇게 일본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이 직인 날인 시점마저 거짓으로 포장하는 데 가담했던 것이다.

철종 때인 1858년 경기도 용인시에서 태어나고 스물다섯 살 때인 1883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박제순은 이조참판·호조참판·성균관대사성 같은 전통적인 관직도 역임했지만, 그보다는 외교나 국제통상 분야에서 훨씬 더 두각을 보였다.

1883년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가 되고, 청나라 천진(톈진)에 서기관으로 파견됐다. 1888년에는 인천부사 겸 감리통상사무가 됐다. 1890년에는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5개국 전권대신에 임명됐지만 부임하지는 않았다. 1899년에는 청나라와의 한청통상조약 체결에, 1901년에는 벨기에와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관여했다. 외교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관철시킨 1876년 이래로 조선 시장에서 청나라를 제치고 경제적 우위를 유지했다. 일본이 정치·군사적 우위까지 차지한 것은 1894년이다. 일본은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고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경제뿐 아니라 정치·군사에서도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됐다.

박제순이 친일 본색을 드러낸 것은 이 시점부터다. 을사늑약 11년 전부터 일본에 배팅을 했던 것이다. 그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해외침략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편들었다는 점은 동학혁명 당시의 대중가요 가사에도 묻어 있다.

2005년 3월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린 역사학자 현광호의 논문 '박제순, 일본맹주론을 맹신한 외교가'는 "그의 관직 경력 중 특기할 것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무렵 일본군 및 경군(京軍)과 연합하여 공주에서의 농민군 공격전에 참가한 것이다"라며 이렇게 서술한다.

"이 당시 '새야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라는 노래가 있었다. 여기서 박이란 박제순을 일컫는 말로, 농민군 진압에 박제순의 공이 컸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본군과 손잡고 조선 민중의 군대를 진압했고 거기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대중가요 가사에까지 등장했다. 을사늑약 때는 외교로 친일을 하고 동학혁명 때는 토벌작전으로 친일을 했다. 문무겸전의 가치를 친일에서 실현한 셈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제순 편은 1901년 11월 그가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일동맹 문제 등을 협상한 일을 소개하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라며 "일본에 체재하면서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1901년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894년에는 동학군 진압을 통해 일본의 조선 장악에 일조했다. 훈장을 받을 이유가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을사늑약을 도와 '을사오적'이 된 박제순은 1910년 국권침탈 때도 일본을 도와 '경술국적이 됐다. 친일 2관왕 박제순에 대한 일본의 보답은 상당했다. 귀족 작위인 자작을 부여하고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추대했다. 일본관광단의 일원으로 공짜 여행도 하게 해줬다.

일본은 중추원 고문이 된 그에게 1916년 사망 때까지 연봉 1600원을 지급했다. 1910년에 평안도 중화군수인 친일파 김연상의 연봉이 600원이었다. 박제순의 연봉은 이것의 두배 반을 넘겼다. 일본은 1911년에는 은사공채 10만 원도 지급했다.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줬던 것이다.

제2의 박제순을 우려한다
 

2022년 9월 30일 한미일 대잠전 훈련에 참여한 전력들이 3동해 공해상에서 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 앞쪽부터 미국 원자력 추진 잠수함 아나폴리스함, 미국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 한국 구축함 문무대왕함, 일본 해상자위대 신형 준이지스급 구축함 아사히함, 미국 이지스 구축함 벤폴드함, 미국 유도미사일순양함 챈슬러스빌함. [일본 방위성 제공] ⓒ 연합뉴스

 
'박제순 II'가 재림하기 쉬운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박제순이 한일 군사협력의 열렬한 주장자였다는 점은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위의 현광호 논문은 박제순 같은 을사오적들의 외교 성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들은 러일전쟁 이전 시기, 즉 대한제국이 비교적 외교정책을 자주적으로 운용할 여지가 있었던 때부터 일본과의 제휴를 지지했다"라며 "이들이 일본과의 제휴를 지지한 주요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15년 10월 <인물과 사상>에 수록된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의 기고문 '고독한 변절자의 초상, 박제순'은 "1900년부터 1904년까지 그는 꾸준히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했다고 한 뒤 1901년 일본에 가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협상을 벌인 일을 소개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1901년 방일 때 그는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훈장만 받아왔다. 하지만 이 협상에서 한일동맹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일본에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위 논문은 박제순이 고무라 대신과의 회담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한다" 등의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기술한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을 필요성이 있다고 일본에 가서 광고를 하고 온 셈이다. 이런 그의 인식이 1905년 을사늑약 찬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20년 만에 또다시 한일 군사협력에 관한 말들이 공공연히 오가고 있다. 이것을 반대하면 편협한 좌익으로 몰리고 찬성하면 애국자처럼 비치는 분위기가 한일 양국 정부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연봉 1600원 및 은사공채 10만원' 후보자들이 육성되기 쉬운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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