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침입 범죄 가해자들은 자꾸 '다짐'을 했다. "재범 방지를 위하여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을 것을 다짐"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유리한 양형'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자의 형량은 줄었다.
다음 사건에 대한 판결 역시 그러했다.
2021년 3월 새벽 6시, 피해자 A(29)씨는 자고 일어난 뒤 본 적 없는 속옷이 현관문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슷한 일을 지난 1년 7개월 동안 6번 겪었다. 어느 날은 팬티 10개, 어느 날은 브래지어 1개, 어느 날은 팬티 2개에 브래지어 1개가 놓여있었다.
가해자는 인근에 살고 있었다. 다른 집에서 속옷을 훔쳐다가 반지하에 있는 피해자 집 창문을 열고 손을 안으로 집어넣어 속옷을 던져두었다. 판결문에는 "피해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벌인 일이라고 했다. 가해자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해자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전화를 걸어 "섹스 해봤냐"고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2021년 5월 열린 재판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10월이 선고됐다. 가해자는 "징역 10월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항소했다. 두 달 뒤인 2021년 7월 2심 재판 선고가 이뤄졌다. 가해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심과 2심에서 달라진 건 없었다. 이미 1심에서 가해자는 속옷을 도둑맞은 피해자들 그리고 A씨와 합의를 한 상황이었다. 흐른 건 시간뿐이었다. 판결문에 기록된 마지막 범죄가 2021년 3월 초순에 범행이 들통난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인신 구속 기간은 최대로 책정해도 5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피고인이 상당기간 구속돼 있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피고인이 재범 방지를 위하여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을 것을 다짐하고 있는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꼽았다.
그렇게, 가해자는 자유의 몸이 됐다.
이처럼 가해자의 형을 감경해주는 유리한 정상으로 '피의자 다짐'을 언급한 판결문은 200건 중 총 11건이다. 그리고 이 중 6건이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피해자의 뒤를 쫓아 주거지를 알아낸 뒤,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현관문 벽에 카메라를 설치한 가해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같은 수법에 당한 피해자만 두 명. 재판부는 "피고인이 정신과 치료를 통해 성적 충동을 조절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곱 번 피해자들의 집 안을 들여다본 가해자에게도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동종범죄로 이미 벌금형 및 기소유예 처분 전력이 있는 가해자에게 재판부는 "피고인과 친족들이 피고인의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인식하고 치료를 다짐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 같이 판단했다.
치료다짐 외에도 재판부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가해자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성충동 조절 장애 등 정신질환이 범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노모 생활비를 보조하고 있다", "피고인의 신체적 건강이 좋지 않다", "정서적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 가족과 사회의 도움이 더 필요해 보인다" 등이 그것이다.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사건 200건(2021~2022년 '주거침입' 사건 판결문) 가운데 74건이 집행유예를, 12건이 벌금을 선고 받았다.
이 같은 '양해'는 자주 배반으로 돌아왔다.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사건의 절반 이상(200건 중 113건)에 달하는 가해자가 동종범죄 전과를 갖고 있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이런 식으로 다 빠져나가게 방치는 상황에서 전과를 조회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며 "피해자가 아닌 재판정에 용서를 구하고 다짐하고 그걸 받아준다. 가해자 입장에선 성인지 감수성 없는 법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허 조사관은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자기 집에 누군가 침입을 시도하고 속옷을 훔쳐 가고 샤워하는 모습을 찍어갔다면 성폭행 직전의 공포와 두려움,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살던 집 자체의 평온을 빼앗겼는데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얻어맞지 않아서 진단서를 발부할 수 없는 '심리적 공포'와 '트라우마'를 인지할 수 있는 눈을 사법당국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5살 청소년을 성추행한 가해자에 대해 재판부는 "스타킹이나 속옷에 대한 욕구 충동의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가해자의 형을 깎아주는 이유가 됐다.
오후 4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을 터다. 15살의 피해자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뒤를 가해자가 쫓았다. 거주지의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하려고 들어가는 피해자를 따라 가해자도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가해자는 말을 건넸다. "I'm from japan"이라며 외국인 행세를 했다.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피해자가 길을 찾아 주려고 하자, 가해자는 갑자기 한국말을 구사했다. "다리 부위에 뭐가 묻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리를 만지며 스타킹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1심에서 징역 3년 6월이 선고됐다. 2심에서는 합의가 이뤄졌다. 가해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심, 2심 재판부 모두 그의 전과를 불리한 정상으로 언급했다. 가해자는 2015년 여성 속옷, 스타킹 등을 훔쳐 특수절도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1심, 2심 재판부 모두 그의 '욕구 충동 조절의 어려움'을 유리한 정상으로 판단했다. "여성 스타킹이나 속옷에 대한 욕구나 충동의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이 유리한 양형 사유로 고려돼야 한다"고 했다.
되짚어보자. 속옷 도둑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6년 후 그는 주거에 침입해 15세 청소년을 성추행했다. 그는 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판부는 가해자의 신상정보 공개 결정도, 취업제한명령도 선고하지 않았다. 다만 보호관찰을 받을 것과 40시간의 성폭력치료강의를 수강할 것을 명했다. 이틀도 채 되지 않는 '치료 강의'를 통해 이번엔, 그의 욕구 충동이 과연 조절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