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7 07:01최종 업데이트 24.04.1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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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다.

우린 여전히 회한과 원통함, 집단적 죄책감으로 이 사건을 기억한다. 세상 어디에서나 예기치 않은 대형 인명 사고는 발생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이 여전히 큰 사회적 고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직도 왜 그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그토록 많은 승객들이 빤히 만인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기초적 해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유족들은 그 긴 세월 가족을, 자식을 잃은 피해자인 동시에 꿈적하지도 않는 정부를 향해, 법정을 향해, 진실을 추궁하는 투사로 살아와야 했다. 참사 책임을 지닌 정권이 탄핵되고 새 정권이 들어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진실을 묻어 두고 숱한 억측과 의혹 속에 방치한 이 같은 선례는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부는 심지어 추모를 봉쇄하고, 방해하고, 유족들을 적대시했다. 언론 보도는 철저히 정부의 방침을 따라 진실을 봉인하는데 협력했으며, 유족들은 또 다시 전사가 되어 거리에 나서야만 했다.

이미 발생한 비극이 더 큰 사회적 분열과 상처로 진화되는 과정을 우린 반복해 왔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사를 맞은 사회가 슬기롭게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최대의 참사로 기록된 2015년 파리 테러의 사례를 통해 그 방법을 엿보고자 한다.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 현장 ⓒ AP/연합뉴스

 
총 130명의 사망자와 413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테러 사건이 2015년 11월 13일 파리에서 발생했다. IS세력임을 자처하는(그러나 모두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국적자들인 이민2세) 3개 그룹의 테러리스트들은 파리와 파리 외곽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테러를 벌였다. 그 첫 번째는 파리 북부 생드니 축구경기장 부근에서 벌어진 자폭 테러이며, 두번째는 파리 시내 카페 테라스에 앉아 금요일 저녁의 여유를 누리던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총격, 그리고 9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대중 음악 공연장 바타클랑 진입 테러가 그것이다.

이날 밤 9시 50분, 무장 테러범 3인이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인 <이글스 오브 데드메탈>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바타클랑 극장에 들어가 총격을 가하며 순식간에 9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테러가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 진입했고, 첫 번째 테러범을 사살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테러범은 20명의 관객을 잡아 2층으로 올라가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2시간 넘도록 대치하던 끝에 사살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1500여 명의 관객들이 있었다. 이들 중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인근 16개 병원에 신속히 실려 갔으며, 공연을 하던 가수들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즉시 현장에 도착한 대통령

테러가 있던 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첫번째 테러 목적지였던 생드니 경기장에서 프랑스-독일 친선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테러범들은 관중들을 포함, 대통령을 노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은 철통 보안 중이던 경기장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고, 그러자 그 부근에서 자살폭탄조끼를 터트려 삶을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 1명도 함께 사망했다.

대통령은 경기 관람 도중, 시내 일대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듣고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와 대책회의에 참석하였으며, 회의 직후, 테러범과 경찰이 대치 중인 바타클랑 극장으로 달려간다. 도착 즉시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들의 만류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는다. 새벽 1시 반경 모든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현장을 지켰고, 그 앞에서 당시까지 확보된 사건의 전말을 직접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한다. 비록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긴 하였으나, 올랑드 대통령은 사건 발생 당일, 적극적으로 현장에 임하여,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국가 수장의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날 테러의 배경에는 4년에 걸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온 서방 세력(미국과 그 우방국들)과 그 사이 시리아를 장악한 급진 이슬람세력 IS 와의 갈등, 시리아 내전이 발생시킨 수십만 난민의 유입, 이로 인해 증가된 이민자들과의 갈등이 깔려 있었다. 올랑드는 테러 후 이틀째 되는 날부터 전투기를 출격시켜 IS지휘 본부와 훈련 센터 등에 폭격을 가했다.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이러한 행위는 끝없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고, 시민 다수가 원하는 방향도 아니었지만, 대통령으로선 신속한 응징이라는 버튼을 누르며, 또 다른 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행한 셈이다.

밀물 같은 추모 행렬
 

파리 바타클랑 공연장 앞 추모 현장 이슬람국가(IS) 테러로 89명이 숨진 프랑스 파리 바타클랑 공연장 주변에 15일 정오께(현지시간) 추모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이 쌓여 있다. ⓒ 연합뉴스

 
금요일 밤과 토요일 새벽 사이 벌어진 참극 이후, 파리 시민들은 싸늘한 적요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테러범 중 2명은 아직 잡히지도 않은 상태. 정부는 바깥 출입을 삼가해줄 것을 당부하였으나, 일요일 아침부터 테러가 벌어졌던 모든 장소는 물밀듯 밀려든 추모객들로 넘쳐났다.  

이 시기 프랑스인들은 헤밍웨이가 쓴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책을 다시금 베스트셀러로 만들면서,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 "테러범이 우리를 위협해도, 우린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다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축배를 들 것"이라며, 혹시라도 테러가 질식시킬지 모를 '자유'와 '박애'의 가치를 소리 높여 외쳤다.

당시 한 방송사의 요청으로, 간밤의 참사로 핏자국이 흥건한 바타클랑 극장 앞까지 가서 현장을 취재를 해야 했던 나는, 테러가 있던 현장 주변이 수백만 인파들 속에서 자유와 연대, 사랑, 박애, 평화, 관용으로 뒤덮이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누구의 입에서도, 복수, 보복, 안보 같은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시민들은 보복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스스로를 포박할 가장 큰 위협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건 발생 이틀 후, 언론은 당연하게도 130명의 사망자(프랑스인 104명, 19개국의 외국인 26명)와 명단을 각자의 이름, 국적, 나이, 각각의 희생자들이 안고 있는 이러저러한 사연 등과 함께 일제히 발표했다. 사건 발생 초기, 그 어떤 언론도 피해자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가 될지를 예측하는 기사는 싣지 않았다. 그러한 문제는 전혀 사건의 핵심이 아니라는 판단에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다투어 보상금부터 얘기하면서 마치 유족들을 보상금 때문에 움직이는 단체인양 몰아갔던 국내 언론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테러 2개월 뒤 발족된 피해 가족 협회
 

파리 테러 피해자 단체 'Life for Paris'의 로고 ⓒ Life for Paris

 
2016년 1월에는 '11월 13일: 박애와 진실', 'Life for Paris'라는 2개의 피해자 단체가 결성되었다. 모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피해자들과 그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지원하며, 진실의 실현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1월 13일 : 박애와 진실 협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2017년 1월부터 협회는 법무부로부터 테러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 민간 당사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승인받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이 그토록 요구하던 바로 그 내용을 이들은 즉각 정부로부터 당연한 권리처럼 부여받을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피해자 단체의 결성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FENVAC : 집단 사고 및 테러 피해자 전국연맹)의 협력과 지원 속에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FENVAC은 집단 사고 발생 시, 피해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협회 창설, 다양한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정보, 법적 조치, 보상 및 예방 조치에 있어 피해자와 가족에게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1994년 발족된 단체다. 피해 지원과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정부 관련 부처와 긴밀히 협력하고 지원을 주고받는다.  

1980~1990년대에 발생한 재난의 희생자 가족들에 의해 1994년에 발족한 이 단체는, 대형 사고 발생시, 행정적·의학적·사법적 면에서 특별한 돌봄과 지원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피해자들이 모여 체계적 대응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었다. 1995년 FENVAC은 국회로 하여금 재난 피해자 단체가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제2-15조가 통과되도록 하는 제도적 성과도 이뤄냈다.

이들은 대형 사고 발생 시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닥친 재앙과 그것이 초래한 사회적 여파를 해결하는 주체로 피해 당사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국회 표결로 관철시킨 것이다.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는데 급급한 정부가, 언론을 이용해 피해자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그들을 죄인 취급해 온 한국 사회에서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2004년, 법무부는 FENVAC의 폭넓은 자문을 받아 집단 사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방법론적 지침을 발표하면서, FENVAC은 관련 분야에서 확고한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이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피해 가족들에게 협회 창설을 장려하고 지원, 자문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 80개 이상의 협회가 이 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상태다. 2015년 11월 테러 발생 직후, 총리는 FENVAC을 테러 피해자 보호에 관한 부처 간 협력 위원회의 멤버로 받아들이고, 테러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

테러 직후, 보건부는 해당 사건과 관련 모든 부상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될 것임을 즉각 밝혔고, 테러로 인한 사망 희생자들의 자녀들에게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지위가 약속되기도 했다. 

육체적인 부상을 입지 않은 경우에도, 테러 현장에서 참극을 겪은 후 트라우마를 겪고 있거나 가족을 잃어, 심리적 장애를 겪는 이들을 위한 심리 지원 센터가 파리에 마련되었고, 테러 목격 후 트라우마를 겪는 지역 주민 심리 응급실도 따로 설치되었다.  

2016년 2월에는 피해자 지원을 전담하는 정부 부처가 발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대통령이 바뀐 후, 신임 대통령 마크롱은 해당 부처와 지원 사무국(SGAV)을 폐지하고 법무부 산하 테러 피해자 지원 담당 부처로 규모를 축소했다.

그 밖에, 테러 희생자와 피해자들에게는 총 8500만 유로(한화 약 1230억 원)에 달하는 보상이 이뤄졌다. 이는 테러로 인해 발생한 130명의 사망자를 비롯, 총 2625명에 달하는 육체적, 심리적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이 보상금은 정부 예산이 아니라, 1986년에 창설된 희생자 지원기금(FGTI)에서 지급되었는데, 이 기금은 프랑스에서 체결된 9천만 건의 재산 보험 계약(자동차, 주택 등)에 부여된 5.90유로의 분담금으로 조성된다. 즉, 국민 모두가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대형 재난의 공동 보증인이 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국회 진상조사 위원회의 결론

사건 발생 2개월 뒤인 2016년 1월, 국회에서는 진상조사 위원회가 발족되어 약 30명의 국회의원들이 6개월간 피해자, 피해자 가족, 주민, 경찰 등의 증언을 들으며, 테러 진압 과정에서 저질러진 치명적 실수나 과오가 없는지 면밀히 살피는 진상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총 200시간에 걸쳐 진행된 수십차례의 청문회 결과 7월에 발표된 300쪽짜리 결과 보고서는 진압 과정에서의 심각한 과오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정보기관의 활동 전반에 커다란 결함이 있음이 드러났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2016년 7월 의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제출될 때, 조지 페넥(Georges Fenech ) 공화당 의원은 테러 당시 전문 경찰 부대(FIPN)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로 지적했으나, 당시 진압을 지휘했던 세바스티앙 피에트라산타 경찰청장은 그들이 당시 투입한 BRI(경찰특공대)도 충분한 역량을 가진 엘리트 부대이며 FIPN의 배치로 달라지는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추모 주도한 대통령
 

2015년 11월 27일 당시 프랑수아 올란드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 테러로 사망한 130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당시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 발생 당일부터 3일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고, 유럽 연합은 테러 다음날인 11월 16일을 애도의 날로 정하여, 모든 유럽 연합 소속 국가가 1분간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2015년 11월 27일에는 대통령 올랑드가 앵발리드 호텔 안뜰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국가 추모식을 주재, 근위대 오케스트라, 프랑스군 합창단 외에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어 헌정 음악회가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테러가 발발한 모든 자리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 현판이 만들어졌으며, 정부는 공식 행사를 통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2016년 11월, 비운의 상처를 간직한 공연장 바타클랑의 문을 1년 만에 다시 열고, 무대 앞으로 관객을 모은 사람은 영국 가수 '스팅'이었다. 그는 첫 무대를 테러 희생자들에게 헌정했고, 그 자리에는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들 1500명이 초대되었다. 스팅은 이날, 프랑스어로 "오늘 밤 우리에겐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1년 전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역사적인 공연장이 대표하는 음악과 삶을 기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바타클랑을 음악의 생명력으로 채우며, 슬픔을 환희로 승화시켰다. 

파리 테러와 세월호 참사의 결정적 차이점
 

16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광장 합동분향소로 향하다 종로2가 YMCA앞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혀 있다. ⓒ 권우성

 
대형 참사는 언제 어떤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사회가 참사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을 체계적으로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참사는 불운한 사고로 그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참사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불안과 분노, 불신을 심는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파리 테러는 지울 수 없는 슬픔일지언정 회한과 분노의 기억은 아니다. 파리에서 벌어진 모든 대형 사고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은, 정부가 제 할 일을 제발 해달라고 절규하며 처절하게 거리에서 싸우는 유족들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정부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모습처럼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었다.

10년 전, 우리는 간절히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었다. 여전히 우리는 그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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