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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그렇게 해서 학교를 떠났다. 나는 학년 초에 다짐했던 대로, 녀석을 여름방학 전에 학교 담장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이 마침내 퇴학 통고를 받고, 학교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그것으로 녀석과 나 사이에 있었던 전쟁도 막을 내렸다. 동료 교사들은 내가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드러내 놓고 악수를 청하는 교사도 있었고, 은밀한 목소리로 축하한다고 속삭이는 교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는 정작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나는 내가 녀석과의 전쟁에서 단지 꼭두각시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퇴학 결정은 학교가 내렸고, 나는 학교가 그러한 결정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옆에서 입 몇 번 나불거린 것이 전부였으며, 녀석에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돌덩어리라도 삼킨 것같이 무거운 기분이었다. 그만큼 나는 답답하고 괴로웠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함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 이유는 내가 여전히 녀석에게 가졌던 분노의 감정을 깨끗하게 해소하지 못한 데 있었다. 나는 녀석을 단지 학교 담장 밖으로 내모는 것만으로는 다할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녀석을 학교 담장 밖으로 내쫓음으로써 나는 더 이상 그 감정을 해소할 길이 없어진 데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당한 것만큼 녀석을 죽어 넘어지게 짓밟아 주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나는 그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앉아 점차 뒤틀리고 메마른 겨울나무처럼 성말라갔다.

녀석이 학교를 떠난 이후로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까진 도토리 대신 에이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별명은 걸리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때쯤 내 특기는 공포의 이단옆차기였다.

나는 결국 그 해 겨울방학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났다. 때마침 학교 내에서의 여하한 폭력도 결코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사회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내가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같은 여론에 떠밀려 교장이 교사들에게 체벌을 극력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교장의 지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담임교사 편을 연재했습니다. 이후에는 같은 분량으로 퇴학생 편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이어지는 글이 무척 지루하실 것 같습니다. 장편이 아닌 단편이라는 점으로 위안을 삼으시기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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